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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55>아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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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55>아편전쟁

입력
2003.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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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7월18일(음력 6월6일) 영국이 함선 48척과 병력 4,000으로 청(淸)을 공격하면서 아편전쟁이 시작됐다. 두 해 뒤인 1842년 8월2일(음력 7월2일) 난징조약(南京條約)으로 마무리된 이 전쟁은, 최근 미국이 이라크에 대해 벌인 '석유전쟁'처럼, 두드러지게 추악한 전쟁이었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중국에 밀수출하던 아편이 중국인의 건강과 국민 경제에 치명적 해를 입히고 있던 상황에서, 아편 무역을 엄격히 금지한 청에 대해 이의 합법화를 강요하기 위해 영국이 일으킨 것이 이 전쟁이기 때문이다. 영국은 또 이 전쟁을 빌미로 중국 시장의 개방과 군사 기지의 획득을 꾀했다.아편전쟁은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청제국이 사실은 '종이호랑이'였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린 사건이기도 했다. 두 해 동안의 전쟁 기간에 영국군의 사상자는 520명에 지나지 않았던 데 비해 청조의 사상자는 2만에 이르렀고, 패전의 결과 청은 중국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전쟁의 한 당사자였던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조차 청의 군사력이 이렇게 허약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청은 난징조약에 따라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전비배상금(戰費賠償金) 1,200만 달러와 몰수한 아편의 보상금 600만 달러를 영국에 지불하는 한편, 광저우(廣州)·샤먼(厦門)·푸저우(福州)·닝보(寧波)·상하이(上海)의 다섯 개 항을 개항해야 했다. 영국은 그 뒤 추가조약을 통해 영사 재판권 인정, 개항장의 조계 설치, 최혜국 대우 등의 특권을 획득했고, 이어 미국과 프랑스도 청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해 여러 특권을 얻었다. 아편전쟁과 난징조약은 한 세기 뒤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으로 막을 내릴 '반(半)식민지 중국'의 길을 열어놓은 셈이다. 홍콩은 1997년 7월1일 중국으로 반환됐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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