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익 선배 얘기를 조금 더 해야겠다. 생각나는 일도 많고, 1995년 중국에서 만나게 된 일이 기적 같았기 때문이다. 1917년 함남 함주군 군서리에서 태어난 한 선배는 함흥 고보를 졸업한 후 국민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으며 돈을 모아 도쿄 유학을 왔다. 1937년 도쿄미술학교에 한 선배와 함께 입학한 한국 사람이 정관철 정보영 김학원 등으로 그 후 북한 현대미술을 주도한 화가들이다.그는 학교에 입학한 후 하루 종일 방안에서 그림만 그리다가 학교 갈 때만 잠시 외출하곤 했다. 물감 투성이가 된 옷 한 벌로 사계절을 보내는 그에게는 '우에노(上野)의 거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활달하고 낙천적인 성격이어서 주변에 친구와 따르는 후배가 많았다. 그는 앞서 얘기한 대로 교관 폭행사건으로 퇴학을 당한 후 귀국, 1943년에 열린 제22회 선전에 '부엌에서'를 출품해 특선에 뽑혔다. 이 그림은 화려한 서구적 색채 감각과 세련된 필치가 돋보인 작품이었다.
나는 46년 월남할 때 함흥에서 그를 만났고, 그 뒤로는 연락이 끊겼다. 나는 송별회에서 나와 함께 가자고 여러 차례 권했다. 하지만 그는 "가고 싶지만 노부모가 있어서 못 간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그가 나와 함께 남으로 왔다면 그의 재주는 화려하게 꽃피었을 것이다.
월남한 후 늘 그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지내면서 평양미술제작소에서 활동하다가 특정인의 초상이나 기록화 제작을 거부, 반동으로 몰려 원산 벽돌공장으로 쫓겨갔다거나 그 후에 복권이 돼 북한의 국가미술 전람회와 모스크바 전시회에 낸 작품이 호평을 받았다는 얘기 등은 소문으로 들을 수 있었다. 또한 76년부터는 북한 당국이 그의 작품성을 인정하고 작업 활동과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그러던 차에 95년 말 우연히 한 선배가 중국 옌지(延吉) 예술학교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함흥 출신 후배인 권옥연(80)씨, 사진작가 문선호(작고)씨와 함께 당국에 북한 주민 접촉신고를 하고 단숨에 달려갔다. 한 선배의 개인전이 열린 12월2일 옌지의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과 흰 머리칼이 옛 모습을 감출 수는 없었다. 한 눈에 알아본 나는 한 선배를 붙들고 엉엉 울었다. 이때 내가 가져간 화집을 건네주자 한 선배는 "내 평생 이런 책을 만들면 원이 없겠다"고 말했다. 북한 최고의 작가로 꼽히면서도 그때까지 화집도 하나 없었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 일행은 즉시 그의 화집 제작 작업에 들어갔다. 전시 중인 작품 '평북 산드리의 봄'(1954년작), '왕찔레꽃'(1987년작) 등 풍경화와 정물화 70여 점을 숙소로 옮겨 문선호씨가 휴대용 카메라로 밤새 촬영했다. 일행 3명이 한 선배의 작품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한 점씩 사기도 했다.
서울로 돌아와 나는 일본의 저명한 화랑인 '미술세계'에 의뢰, 화집 500부를 찍었다. 아무래도 일본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해야 전달할 때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술세계'는 북한 작가의 작품을 일본에 소개하는 데 앞장선 화랑이다. 화집을 제작하며 들어간 경비 1,500만원은 권옥연씨 등과 나누어 부담했다. 이듬해 화집을 전달하려고 했으나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으로 남북관계가 악화, 무산됐다. 우여곡절 끝에 97년 초 '미술세계' 사장이 평양에 가서야 전할 수 있었다.
나는 그 후 화집을 잘 받았는지, 또 마음에 들었는지 알 수 없어 무척 궁금했는데, 갑작스럽게 한 선배의 부음을 들었다. 화집 출간과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어주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가버린 것이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조선인의 기백을 잃지 않은 사람이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인상파 기법을 결합한 독특한 화풍을 개척한 걸출한 화가로서 뇌리에 각인돼 있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신념을 꺾지 않고 확고한 자신의 예술세계를 이룩해 인정 받은 모습을 볼 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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