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대선자금 공개' 제안이 '여권 우선 공개' 여론에 부딪히자 청와대가 난처해 하는 가운데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유인태 정무수석은 17일 "민주당이 먼저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치현실과 맞지 않는 얘기"라며 "여야가 공개 기간, 범위, 절차 등에 합의하지 않으면 민주당이 먼저 하더라도 '쇼'에 그칠 수 있다"고 말했다. '공개의 틀'에 대한 여야 합의가 선행되지 않으면 민주당의 선(先)공개는 중앙선관위에 신고한 내용의 재판(再版)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청와대가 생각하고 있는 공개 대상에는 법정 선거운동 기간에 사용한 자금 이외에 사전 준비에 들어간 자금, 선거와 관련 있는 정당활동비 등이 모두 포함된다. 때문에 여야가 사전에 기간을 정해 공개 대상을 구체적으로 정해 놓아야 실효성 있는 공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청와대의 구상이 실천되기 위해서는 여야의 합의가 필수적인데, 합의를 이룰 수 있는 여건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다.
그래서 청와대 일부에서도 "정대철 민주당 대표에 대한 검찰 소환조사 문제가 초미의 현안인 상황에서 야당을 자극할 수 있는 제안을 한 것은 시기적으로 부적절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우선 청와대와 민주당의 협의 수준도 아주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고 더욱이 야당과의 협상 채널 확보는 더욱 요원하다. 이와 관련, 유인태 수석이 "야당으로서도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 : 감히 청하진 못하나 본래부터 바라던 바)일텐데 왜 '물귀신 작전'운운하며 거부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에는 곱씹어 볼만한 대목이 있다. 이 말은 한나라당도 대선자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서 여야가 함께 '면죄부'를 받자는 제의를 내팽개치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뒤집어 말하면, 앞으로 정치자금 관련 수사의 불똥이 한나라당에 옮겨붙게 되면 오히려 그때 여야간의 협상 테이블이 마련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어쨌든 현재로서 청와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야당의 협조 없이 여론을 상대로 '대선자금 공개'의 당위성을 설득하는 일 정도다. 정무수석실이 후속조치 보고서에 국민토론회 개최, 중앙선관위를 통한 제도개혁 추진 등의 내용을 담은 것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청와대보다는 정치권이 나서야 할 일이라는 지적이 있고 민주당 정 대표가 검찰 소환에 불응하는 상황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청와대도 여전히 "가뜩이나 서운해 하는 정 대표에게 설득이라는 말도 꺼내기 어렵다"는 분위기다.
/고태성기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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