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일찍 여의어 한 번도 엄마의 정을 느껴본 적이 없는 밀양에 사는 '똥개'(정우성) 철민. 그가 '똥개'라고 부르는 진짜 똥개가 축구부 아이들 손에 끌려 보신탕으로 변한 날 인간 '똥개'의 학력도 마침표를 찍는다.어느날 아버지(김갑수)는 "로데 5거리에 원두 커피 전문점을 차리는 게 꿈"이라는 정애(엄지원)를 데리고 와서 "친남매처럼 지내라"고 말한다. 동네 친구 대떡이 아버지가 동네 건달 꾐에 빠져 전재산을 날리고, 대떡이마저 만신창이로 두들겨 맞자 철민은 오덕만 일당에게 쳐들어간다.
무시무시한 유치장 결투 장면을 제외하면 이것이 영화 '똥개'의 줄거리 대부분이다. 그러나 '똥개'는 동네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쓰게 만들던 '달고나' 좌판처럼 관객의 눈길을 계속 잡아 둔다. 백수의 얘기지만 열등감이나 비판의식은 끼어 들 새가 없다. 그저 백수 '똥개'의 삶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얘기를 풀어 나간다. 그러니까 유쾌하고도 '짠∼한' 에피소드가 줄줄이 이어져 나온다.
'똥개'는 '쪼잔'하다. 아버지와 계란 후라이를 갖고 싸우고, 아버지 촌지 봉투에서 지폐 한 두 장을 꺼내는 게 고작이다. 정애가 왔을 때도 그녀의 과거나 사연보다는 TV를 함께 봐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 대신 똥개가 화나면 무섭다. 똥개가 세상을 확 뒤집은 것은 딱 두 번이다. 형제처럼 친근한 똥개가 억울하게 죽은 날, 그리고 불쌍한 대떡이네가 형편없이 당한 날.
개싸움을 연상시키는 유치장의 오랜 결투신은 영화의 최고 볼거리.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개처럼 처절한 싸움은 도입부 아코디언 연주로 흥을 돋구는 상여 행렬 만큼이나 아이러니컬하며 매력적이다.
약간 부패했지만 약간은 정의로운 수사과장 아버지, 사사건건 똥개에게 시비를 붙는 오덕만의 꼬붕 진묵(김태욱), 그리고 여성 캐릭터들까지 제 몫을 충분히 했다. 더욱이 정애가 깎아주는 사과를 먹으며 뒹굴뒹굴 방을 굴러 나가는 정우성의 모습은 '똥개' 자체다.
작은 에피소드들이 비장하고 거창한 이야기를 기대하는 관객을 만족시켜줄 수 없다는 치명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소도시 일상의 소묘로는 매력이 넘친다. 감독 곽경택. 16일 개봉.
/박은주기자 jupe@hk.co.kr
● 곽경택 감독
"동건이는 턱 부분은 발달했는데 눈 윗부분을 잘 안 쓰는 배우였고, 우성이는 눈매는 발달했는데 입 부분은 부각이 된 적이 없다 아임니까. 그래서 '친구'에서는 동건이의 이마 부분을, '똥개'에서는 우성이의 입 부분을 많이 썼습니다."
"잘 생긴 배우를 데려다가 사투리 시키고, 망가뜨리는 게 취미냐"는 질문에 곽경택(37) 감독은 이렇게 대답했다. "배우의 조금 다른 각도를 보여줬을 뿐인데…." 곽 감독은 얼굴에 비해 연기력은 조금 부족하다 싶은 남자 배우를 길들이는 데 탁월하다. 진짜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는 정우성, 느린 사투리를 쓰는 한심한 경상도 사내 정우성의 모습에서 감독의 탁월한 조련이 읽힌다.
'똥개'에서 그는 또 '관계'를 다루는 데 특별한 감각을 갖고 있음을 증명한다. 마사지 걸인 순자와 불량 소녀 정애의 대화를 다루면서 여성 간의 미묘한 불화를 표현한 섬세한 눈길! "시나리오 쓰면서 여자 대사를 만들 때는 진짜 여자 같은 자세가 나와서 보는 사람들이 웃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부자 관계도 그렇다. 아버지와 똥개의 대사는 호감을 표하지는 않지만 정감이 뚝뚝 떨어진다. "우리나라 아버지란 늘 사회 생활에 바쁜 사람들이고 '사랑한다' 따위의 말은 하지 않지만 그냥 아버지와 아들이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좋은 기억 아닌가요."
'친구' '챔피언' 등 굵직한 남성 영화를 만들어 온 곽 감독에게 '똥개'는 오히려 부담스러운 작품이었다. 소도시의 할 일 없는 청년의 얘기가 너무 빈약해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밀양 같은 소도시에서 살아본 적도 없다. 촬영 시작 두달 전 그는 밀양으로 짐을 싸들고 내려가 그냥 지냈다. 소도시의 나른함, 낯선 기간을 통해 그는 반전이나 쓸데 없는 멜로 코드를 걷어냈다.
늘 머리 속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그는 벌써 차기 작 '태풍'의 기획을 끝냈다. 분단 한국에 사는 두 남자의 이야기로 대강의 줄거리만 세우고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다른 사람 손에 맡겨 2고가 나온 상태. 스케일이 커서 내년 후반에나 극장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궁금증이 생겼다. 큰 이야기에 강한 듯한 그가 굳이 작은 얘기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살다보면 저지르고 싶은데 못 저지르고 머리로 살아가는 게 인생 아임니까. 한 번쯤 가슴으로 사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그런 시원함." 바로 카타르시스다.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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