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학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한상익 선배가 학교에 교련 담당으로 배속된 장교를 구타한 사건이다. 나보다 함흥고보 2년 위이고, 미술학교도 2년 위인 한 선배는 마음씨가 착하고 민족의식이 강한 분이었다. 나와는 동향인 데다 직설적 성격도 비슷해서 무척 따랐다.내가 본과 1학년이고, 한 선배가 3학년 때의 일이다. 태평양 전쟁이 고비에 접어들면서 일본 국내 정세가 긴박해지고 있었다. 다른 대학에 비하면 꽤 자유로웠던 미술학교에서도 교련 시간이 강화됐다. 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교련 시간을 싫어해서 빠지곤 했는데 불참자는 반드시 보강을 받으라는 통지가 나왔다. 나와 이달주도 이틀간 빠졌다가 연락을 받고 교련 시간에 들어갔는데 그게 한상익 선배의 교실이었다.
태평양 전쟁 직전에 입학한 우리 학년은 처음부터 머리를 짧게 깎으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한 선배 학년은 그런 요구를 받지 않아 장발이 많았다. 그래서 교관들은 전쟁이 터지고 나서는 교련 시간에 군사 훈련보다 장발 단속에 더 열을 올렸다.
우리 교관은 미쓰하시라는 현역 대좌(대령)로 연대장급이었다. 이 교관은 장발인 사람들을 모두 불러 내어 머리를 깎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온 일본 학생 하나가 머리에 흉터가 있다고 하자 "좋다, 들어가"라고 했다. 다음 사람은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는 이유로 넘어갔고, 다음 사람도 역시 자화상이 마무리되는 대로 자르겠다고 약속하고 들어갔다. 미술학도로서는 가장 그럴 듯한 이유였다.
마침내 한 선배 차례가 됐다. 평소에도 민족 차별이 심한 교관은 아주 못마땅하다는 투로 "너는 무슨 이유냐"고 물었다. 한 선배가 "나도 머리에 흉터가 있다"고 하자 교관은 당장 모자를 벗으라고 했다. 머리에는 새끼 손가락만한 흉터가 있었다. 교관은 얼굴이 굳어지며 "이 자식이 나를 놀리는 거야"라고 소리쳤다. 동시에 그는 한 선배의 따귀를 때렸다. 순간적으로 한 선배도 "교관 놈이 왜 학생을 때리냐"며 그의 뺨을 갈겼다. 몸집이 작은 교관은 힘없이 쓰러졌다. 모든 학생들의 몸이 얼어붙은 듯 그대로 서 있었고, 이를 지켜보던 다른 소대의 도요타(豊田) 대위가 군도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나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직감적으로 위협을 느끼면서도 일본 학생들이 같은 민족인 교관 편을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일본 학생들이 팔을 벌려 칼을 빼 들고 달려 오는 대위 앞을 가로막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사람 하면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에 한 선배는 학생과 과장이 있는 교무실로 도망쳤다. 학생과 과장은 한국 학생들의 편의를 봐주고 한 선배와도 꽤나 친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교관들과 조교들이 교무실로 몰려가 한 선배에게 몰매를 가했다. 특히 얻어 맞은 교관은 한 선배를 당장 퇴학시키지 않으면 헌병대에 넘기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교수회의에서 그 교관이 전근을 가면 다시 입학시키기로 하고 퇴학 처분을 내렸다.
그 뒤로 교련 시간만 되면 한국 학생들은 집중적 공격대상이 됐다. 그러던 중 2학년 가을 학기에 야영 군사훈련 도중에 또 한 차례의 돌발사건이 일어났다.
유화과 학생들 몇몇이 야영장에서 술을 마시며 놀고 있었는데 사이토(齊藤)라는 예비역 중위가 들어와 서 "너희들 때문에 대좌가 화났다.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돌아서는 순간 나는 우스꽝스러운 말투로 "아저씨, 미안합니다∼"라고 말했고 여기저기서 킥킥대며 웃어댔다. 그는 뒤를 확 돌아보더니 "이 X같은 창코로(중국 사람을 비하하는 욕) 자식"이라며 나를 패기 시작했다.
그는 나에게 한 주먹감도 안 되는 상대였지만 한 선배가 퇴학 당한 일도 있고 해서 꾹 참았다. 나는 속으로 "이 놈 한번 두고 보자"며 이를 악물고 실컷 맞았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