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도 몰랐다. 허리 펼 틈 없이 벼 뿌리고(직파·直播) 옮겨 심은(이앙·移秧) 논이 원형 탈모증 마냥 밤새 뻥 뚫리고 다시 심길(보식·補植) 몇 차례. "요상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여." 고개를 갸우뚱하다 슬쩍 본 김가네 논도, 박가네 논도 숫제 대머리 논이다. "어떤 썩을 놈이 한 짓이여?" 반도 땅끝 전남 강진과 해남이 맞닿은 사내간척지 들녘에 떠돌던 주민들의 목격담이 지목한 범인은 바로 남미산 왕우렁이. 언제부턴지 수도 없이 불어난 왕우렁이가 벼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잎, 줄기를 갉아먹었던 것이다. 길러 팔면 돈 되는 쏠쏠한 부수입거리와 제초제 쓸 필요 없는 친환경농법을 내걸어 이국에서 시집온 '왕우렁이각시'가 20년 만에 벼 도둑이 된 셈이다. 엄동설한에 죽어야 마땅한 왕우렁이가 국내 기후환경에 적응하면서 따뜻한 남녘 논부터 야금야금 먹어대기 시작했다. (사진은 왕우렁이 알)"왕우렁이가 더 나쁜 놈들이여."
해남군 북일면 금당리 평야. 논바닥 곳곳에서 왕우렁이 사냥이 한창이다. 5분도 채 안돼 한 봉지 가득하다. "요렇게 안 죽이믄 소용도 없어. 아따 징그런 것들." 김순자(68) 할머니가 잡은 왕우렁이를 길바닥에 늘어놓더니 발로 밟고 비틀어댔다. 속이 터진 왕우렁이 위로 "요것 때메 인자 마을에서 못 살것다" 는 김유덕(52) 부녀회장의 푸념이 얹혔다.
수로 주변 풀밭과 벼 줄기에는 빨간 왕우렁이 알이 산딸기처럼 맺혔다. 벼는 건드리지도 않는데다 1년에 한번 새끼를 치는 토종 우렁이와 달리 왕우렁이는 1년에 10∼14회, 한번에 200∼800개를 산란한다. 일일이 손으로 잡아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주민들이 더 잘 아는 터.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강진쪽 사내간척지 사정은 더 심했다. 푸른 들녘 간간이 폭격을 맞은 듯 휑하니 빈 자리가 눈에 띄어 잡초 밭 같다. 청록색 물결에 언뜻 비치는 연두색 섬은 왕우렁이가 휩쓸고 지나가 모를 다시 심은 자리라고 했다. 내린 비로 물이 차오른 논 곳곳에는 왕우렁이 새끼들이 우글우글 벼 줄기에 달라붙어 있다. 벼는 노랗게 말라 있다.
주민들의 증언은 눈에 보이는 피해보다 실감난다. "처음엔 몰랐어. 바다 메운 자리라 염해(鹽害)인 줄만 알았제. 누가 일러줘서 자세히 봤더니 염소 풀 뜯어 먹드끼 둥글게 갉아먹드만." 강진 이정열(70) 할머니는 "욕봤제. 다시 심어도 낼름 또 먹어븐 통에 모를 5번이나 심었어라" 라고 했다.
특히 피해가 심했던 지난해에는 왕우렁이로 인해 벼 수확이 줄었다는 주민들도 있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생태계 파괴하는 황소개구리보다 벼 훔쳐먹는 왕우렁이가 더 못된 놈들" 이라고 했다. 아직 왕우렁이 피해조차 모른 채 농사 짓는 정성이 부족한 탓이라고 심고 또 심다가 일년 농사를 망치는 농가도 있다고 했다.
처음엔 직파한 벼의 어린 싹을 먹어치웠다. 노인들만 남아 어렵게 짓는 농사라 모내기는 엄두도 못 냈지만 올핸 여러 집이 이앙법까지 도입했다. 이앙법도 임시방편에 그쳤다. 물에 잠긴 어린 밑줄기부터 갉아먹더니 최근엔 "기어올라가서는 연한 잎을 휙 꺾어 물에 담근 다음 먹드란게" 하는 발전된 증언도 들렸다.
벼 도둑놈을 가만둘 순 없는 일이었다. 가장 독한 지오렉스(원예용 살충제)를 써봤다. "뚜껑 꽉 닫아 불고 버텨서는 약 기운에 죽은 황소개구리랑 미꾸라지를 빨아 먹는디 섬뜩하드만." 식용으로 쓴다는 말에 먹어보기도 했다. "하도 미워서 자근자근 씹어 먹었는디 고새 성질을 바꿨는지 맛도 없드란게. 그래서 한새(왜가리)도 안 먹는가벼."
약도 없고 천적도 없는 등 뾰족한 수가 없는 주민들은 "일손도 모자란데 죽이는 방법 좀 가르쳐달라"며 오히려 읍소다.
야누스의 얼굴 왕우렁이
왕우렁이 피해가 시작된 건 3,4년 전부터지만 지난해부터 심해졌다. 처음엔 그저 "수로에 므시 저렇게 시커멓다냐" 하고 말뿐이었다. 제 손으로 논에 뿌린 적이 없으니 왕우렁이 출현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도 분분하다.
"5년 전 어르신 한 분이 몸보신 할라고 둠벙에 빠뜨린 왕우렁이가 수로를 따라 퍼졌다"는 해남 금당리의 '전설'도 들리지만 아무래도 사내간척지 부근에 있던 신방리 만수리 등 3,4곳의 왕우렁이 양식장이 망하면서 비에 쓸려왔다는 게 정설로 보인다.
1992년 '살아있는 제초제' '친환경농법'의 상징으로 국내 논에 뿌려져 상당수 농가 수익에 일익을 담당했던 남미산 왕우렁이의 명성을 사내간척지 주변 주민들도 모를 리 없지만 당한 게 있는 처지라 반응은 차갑다. "아따, 그 징헌 것을 돈 주고 논에다 뿌린다고? 환장하겄네."
그래도 젊은 축은 "일단 벼가 다 자라기만 하면 갉아먹지 못하고 잡초만 먹어 제초제는 덜 쓰는 편"이라고 짐짓 왕우렁이 편을 들기도 한다. 주변에 왕우렁이 농법을 새로 도입하겠다는 농가도 있다고 했다.
왕우렁이가 야누스의 얼굴로 돌변한 것은 무서운 환경 적응력 때문이다. 죽은 생물까지 닥치는 대로 먹는 잡식성 남미산 왕우렁이가 국내에 들어올 때만 해도 벼 피해는 기우에 불과했다. 생존 수온이 2∼38도인 아열대성 왕우렁이가 혹독한 한국의 겨울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모가 자란 다음 뿌리면 잡초만 제거하고 겨울에 모두 죽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따뜻한 남쪽 지방을 중심으로 왕우렁이가 알의 형태로 월동한다는 학계의 보고에 이어 "땅밑으로 파고 들어가 겨울을 난다"는 생생한 주민들의 목소리도 첨가됐다. 겨울에 물 채워 놓은 논은 왕우렁이 서식에 금상첨화라 "씨 뿌려 싹이 나자마자 먹어븐 통에" 경작을 포기한 곳도 있다고 했다.
알음알음 왕우렁이 피해가 보고되자 군 농업기술센터, 면사무소 등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현지조사도 하고 왕우렁이 생태 연구도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겪는 일이라 뾰족한 수가 없긴 주민이나 관이나 매한가지. 해남 북일면 오세영(41) 주사는 "물 관리를 깊게 하고 배수로에 망 울타리를 설치하는 등 단기처방을 알려주는 것 말고는 말단 지자체가 해결하기엔 사안이 너무 크다"고 난감해 했다.
발 빠른 환경 적응과 변종 출현으로 강력해진 왕우렁이의 피해라인이 조만간 북쪽으로 스멀스멀 기어오를게 뻔해 보였다.
/강진·해남=글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사진 왕태석기자
■日·대만 이미 양식금지 "제2의 황소개구리" 지적
남미 고온다습한 아열대 지역에 서식하는 연체동물 왕우렁이는 식용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
1981년 일본 등지에서 밀반입되던 왕우렁이는 83년 정부가 수입승인을 해주면서 정식 양식이 이뤄졌다. 92년 논 잡초를 제거하는 왕우렁이 친환경농법이 소개되자 지난해 말까지 5,000여 가구가 왕우렁이 농법을 활용하고 있다.
문제는 추운 날씨에 약한 것으로 알려진 왕우렁이가 국내 기후환경에 적응해 겨울을 난 후 잡초가 없는 논의 어린 벼 잎을 먹어치우면서 비롯됐다.
전남 경남 경북 등 남부지방을 시작으로 왕우렁이의 피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대책은 없는 상태다. 아직 왕우렁이 피해를 모르고 있어 일부 지자체는 오히려 왕우렁이농법을 장려하고 있다.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홍수 때 하천이나 늪지로 쓸려간 왕우렁이가 무서운 번식력을 바탕으로 닥치는 대로 수초를 갉아먹어 토착생물의 서식처를 망가뜨려 '제2의 황소개구리'가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리보다 먼저 왕우렁이를 수입했다 호되게 당한 주변 국가들은 피해 방지에 적극 나서고 있다. 대만과 일본이 80년대 중반 양식을 금지한데 이어 일본은 아예 검역해충으로 지정해 왕우렁이 퇴치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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