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학교에 다닐 때 내 체력은 대단했다. 학교에서 체력 검사할 때 30㎏이나 60㎏짜리 쌀 가마니를 들고 뛰는 종목이 있는데 나는 60㎏짜리를 들고도 늘 1등을 했다. 키가 170㎝ 정도였지만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다녀 180㎝ 정도로 보였고 어깨도 딱 벌어진데다 체중도 90㎏ 이상 나갔으니 왜소한 일본인들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에는 학교 안이건 밖이건 주먹질도 서슴지 않았으니 오죽했을까.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는 전시 상황이라 지정된 곳에서 식량과 물자가 제한적으로 배급됐는데 나는 거기서도 으레 줄을 서지 않았다. 하루는 한 중년 부인이 나에게 항의를 했다. 그러나 나는 지지 않고 대들었다. "파 하나 사는데 학생이 공부 안하고 오랫동안 줄 서야 돼?"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더니 줄을 섰던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상점 주인이 쫓아 나와 "김상, 어서 파 하나 집어가"라며 나를 달랬다. 이렇게 나는 고향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칠고 막무가내로 행동했다. 적어도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왕초처럼 굴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특히 평안도 출신의 권투선수인 강인석과 친했다. 그는 일본 아마추어 권투 미들급 챔피언을 지냈고 광복 후 귀국해서는 국가대표로 올림픽에도 출전했던 사람이다. 당시 그는 릿쿄(立敎)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권투부 친구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 종종 놀러 왔다. 릿쿄대학이 내가 살고 있던 이케부쿠로(池袋)에 있는데다 우리 집에는 항상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하교 길에 자주 들렀다. 나도 그 학교 체육관에 가서 그들의 스파링 파트너가 돼주면서 권투도 익혔다. 천성적으로 운동을 좋아하고 잘하는 나는 권투도 금세 터득했다.
그때 이케부쿠로에서 국철로 15분 거리에 있을 정도로 가까운 신주쿠(新宿)에서는 조선인 깡패들이 새로 유학 온 조선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돈을 빼앗는 일이 많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신문에도 보도가 됐다. 강인석도 이러한 소식을 들었는지 매우 흥분하여 나를 찾아왔다. "아무 것도 모르는 학생들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등쳐먹다니…. 이런 나쁜 놈들을 그냥 둘 수 있나. 우리가 해결합시다."
나도 그 조선 깡패들이 힘들게 고학하는 학생들까지 괴롭힌다는 말을 듣고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도 몇 명 불러 모았다. 유도선수인 조종비, 축구선수인 이덕기 등 유학생들 중 힘 좀 쓴다는 친구들과 함께 나서고 보니 무서울 게 없었다.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신주쿠에 있는 그들의 아지트 근처로 찾아갔다. 그런데 깡패들을 혼내주러 간다는 소문이 돌았는지 조선 학생 30여명이 싸움 구경을 하러 몰려 나와 있었다. 근처에 일본 경찰이 있었지만 조선인들끼리의 문제라며 별 관심이 없었다.
마침내 길거리에서 그 일당들과 마주쳤다. 그들 중 하나가 눈을 부라리며"웬 놈들이 우릴 찾아?"하며 소리를 질렀다. 강인석이 앞에 나섰다. 그가"야 이놈들아, 왜 같은 동포끼리 못살게 굴어?"라고 말하자 한 녀석이 그에게 박치기 하는 자세로 다가갔다. 그 순간 옆에 있던 내가 그의 얼굴을 힘껏 들이 받았더니 저만치 나가 떨어졌다. 그 순간 사방에서 우리 일행이 깡패들을 일방적으로 패는 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삽시간에 승부가 끝나버렸다. 줄줄이 힘도 못쓰고 쓰러지자 나머지는 대들지도 못하고 도망쳤다. 내친 김에 우리는 그 패거리의 두목을 만나 다시는 그런 행패를 부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알고 보니 마침 이날 조선 주먹패의 신화였던 '시라소니'도 그 현장에 있었다. 그는 일본쪽 진출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차 도쿄에 와 있었는데 그날 소동이 벌어지는 바람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던 것이다. 그가 이 소동에 끼어 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아무튼 그날 이후로 조선 깡패는 물론, 일본인 건달들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 성격이 다혈질인 탓도 있지만 식민지 유학생으로 당하지 않고 살기 위한 자위책이었던 것 같다. 나는 조선인이라고 해서 조금이라도 차별 당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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