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미술학교 본과 1학년 때인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해 태평양전쟁이 터졌다. '조선인 사절'이라고 써 붙인 하숙집이 늘어나고 고등계 형사들이 찾아 오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조선인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눈초리도 예전 같지 않았다. 학교 럭비 팀에서 탐낼 만큼 다부진 체구였던 나는 당시 어느 누구와 싸워도 지지않을 덩치와 뚝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래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권투 곤봉 야구로 단련한 나는 기합술까지 배워 언제 어디서든 일본인들에게 당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언젠가는 학교에서 기합술을 시험하려고 친구들에게 내 등을 마음대로 쳐보라고 했다. 나는 온 몸에 힘을 주고 있으면 어떠한 충격도 견뎌낼 수 있었다. 건장한 체격의 친구들이 전력을 다해 주먹으로 쳤지만 나는 끄떡하지 않았고, 어떤 친구는 오히려 손목이 부러지기도 했다.어느 날 나에게 한상익 선배가 한 젊은 여성을 데리고 찾아왔다. 나는 그 때 이케부쿠로(池袋)역 니시구치(西口) 근처의 다타미로 된 아파트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상익씨는 함흥고보 동문이며 도쿄미술학교 2년 선배로 온순하지만 정의감이 강해 내가 제일 믿고 따랐다. 정온녀라는 이름의 그 여인은 모 잡지사가 주최한 미인대회에 나가 뽑힌 적이 있어서 나도 익히 알고 있었다. 한 선배는 나를 보자마자 그녀에게 문제가 생겼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정 여인이 한 일본인에게 200원(지금 돈으로 약 600만원)을 꾸었다가 갚지 못하자 그 사람이 작은 방이 딸린 아틀리에를 차지하고 무작정 나가라고 협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 여인은 자신이 학교를 마치고 귀국할 예정이어서 특별히 문제 될 것은 없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사람이 얻기 힘든 그 화실을 그냥 빼앗기기보다는 돈을 갚고 자기 대신 쓰라고 했다.
나는 깃초지(吉祥寺)에 있는 그 아틀리에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즉석에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녀는 내 말에 감사를 표하면서도"그 사람 참 무서운 사람이에요. 이중섭 선생도 오셨다가 소리치는 통에 그냥 쫓겨갔거든요"라며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이노우에라는 사람으로 일본 국가대표 스키선수를 지냈고 군대에서 중위로 제대한 지 얼마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내 방에 묵고 있는 함흥고보 동창 최규필과 아래층에 사는 박영익 선배와 함께 그 집에 찾아 갔다. 화실에는 그의 부인이 혼자 있었다. 우리는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밤늦게 돌아온 그 장교는 우리를 보자마자 집이 떠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웬 놈들이냐. 이 밤중에 남의 집에 오다니. 너희 같은 놈들 몇 명이 와도 눈 하나 깜빡 안 해."
나는 굽히지 않고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함을 질렀다. "손님이 왔는데 이게 손님 대접이냐. 당신 나 몰라?"내 목소리가 쩌렁쩌렁 화실을 울렸다. 그는 "네가 누군지 내가 알게 뭐야?"라며 기세가 등등했다. 나는 "좋아, 모르면 가르쳐주지"하면서 오른 손을 가슴 속으로 집어 넣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내가 단도를 꺼내는 것으로 안 그는 약간 주춤하더니 "작은 것은 싫다. 저 큰 칼로 하자"며 벽에 걸린 일본 군도를 가리켰다. 사실 내 옷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좋다. 밖으로 나가자"하고는 의자에 앉은 채 머리를 그에게 가까이 대며 쏘아 보았다. 나는 엉덩이를 약간 치켜든 자세로 그가 일어나기만 하면 그 순간 박치기를 할 참이었다. 그런데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오른 손을 가슴 속에 넣은 채 부드러운 말투로 떠보았다. "당신은 스포츠맨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선배이고 나도 존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돈 200원 때문에 약한 여자를 쫓아내다니 남자답지 않다. 당신을 사나이로 믿고 부탁하는데 아틀리에를 돌려주지 않겠소?"
그를 치켜세우며 타협의 명분을 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순간 그의 태도가 싹 달라졌다. 그는"좋소. 당신의 사나이다운 모습이 마음에 들었소"라고 말하고 다음날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 그는 돈도 받지 않고 나가 버렸다. 정온녀는 그 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화가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해 연락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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