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대 경영학과에 재학중인 L(27)씨. L씨는 지난 해 8월 마지막 학기를 남기고 캐나다로 향했다. 취직을 앞두고 딱히 진로를 결정할 수 없었던 데다 기업 채용시 미국이나 캐나다 어학원에서 받은 수료증이라도 첨부해야 가산점을 받을 수 있기 때문. 유학원의 소개로 올해 2월까지 6개월간의 어학코스를 마친 L씨는 올 3월 학교에 복학했다. L씨는 "영어에 조금 자신감을 얻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연수 기간 홈스테이 가족 이외에는 현지인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다"며 "6개월간 1,000만∼2,000만원의 돈을 괜히 허비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해외여행 자유화와 함께 대학가에 불기 시작한 어학연수 바람. 1990년대 중반부터 폭발적으로 급증한 어학연수가 이제 졸업을 앞둔 예비 사회인에게 '선택' 이 아닌 '필수'가 됐다. 무역협회 집계에 따르면 해마다 한국을 빠져나가는 유학생의 숫자가 34만명. 이 중 상당수는 짧게는 7, 8주, 길게는 1년 코스로 방학 및 휴학기간을 통해 영어권 및 기타 국가로 향하는 어학 연수생들이다. 한 사설 유학원 관계자는 "실물경제는 움츠러들었는지 모르지만 연수를 위해 해외로 떠나는 학생들의 숫자는 줄지 않았다"며 "자신을 위한 장기적 투자를 생각하는 젊은이들에게 어학연수는 '제 5학년' 과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어학연수의 폭발적 증가라는 현상 뒷면엔 여전히 어학연수의 '허와 실'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L씨의 경우처럼 뚜렷한 목표가 없는 막연한 어학 연수는 외화 낭비이며 단기간의 연수로 수준급의 영어를 구사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최근 런던의 사설 어학원 애번다인 컬리지 도산으로 사설 어학원에 대한 불신도 확산되는 추세. '유학닷컴' 관계자는 "아시아 경기 침체로 학생들의 유입이 줄면서 미국 및 캐나다 등지에서도 부실 어학원의 줄도산이 예견되고 있다"며 "사설 어학원을 택할 경우 학비 송금 영수증을 꼭 챙기고 유학원을 통할 경우 약관에 학비보증제도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IMF 이후 '묻지마 연수' 의 거품이 빠지면서 서서히 실속형 '맞춤형 연수'가 정착하고 있는 추세다. 국제유학원의 정남환(49) 원장은 "단기 과정의 순수한 의미에서의 어학 연수는 초·중·고생들 사이에 크게 확산되고 있지만 대학생들의 경우 경력 쌓기 차원의 1년 단위 '커리어 업(Career Up)' 연수가 늘고 있다"고 귀띔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상호학점교류 대학에서의 강좌 이수를 통한 학점 따기.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4년에 재학 중인 김철원(27)씨는 지난 해 2월부터 올 3월까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에 다녀왔다. 3학년 때까지 학점을 관리하고 TOEFL 성적을 어느 정도 갖춘 뒤 매 학기 학교에서 100여명을 선발하는 학생 파견 프로그램에 지원, 학비의 1,200만원 중 30%를 지원 받으면서 다녀올 수 있었다. 김씨는 "처음엔 언어 연수를 하다 적응이 되면서 바로 강의를 수강했다"며 "학점이라는 강제성도 있고 외국 학생과 경쟁하게 돼 열심히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굳이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지 않았더라도 대부분의 대학들이 해외학점인정제(SAP)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대학 부설 어학코스를 밟는 경우 기초반 중급반을 넘어서면 아예 외국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많다. 연세대는 버클리와 UCLA를 포함해 총 400여개의 대학과 파견대학 협정을 맺고 있고 한양대 건국대 등 서울 소재 대부분의 사립대가 해외 대학에서의 학점을 일정 기준 하에 인정해 준다.
학점을 이수하지 않더라고 어학코스 중에서 '전문 영어' 코스를 밟을 수도 있다. 특히 직장인들에게 '비즈니스 영어' '커뮤니케이션 영어' 'IT 영어' 등의 전문 영어 코스가 인기다. 국내에서 중소 의류업체를 운영하다 지난 해 초 캐나다로 건너 간 허준영(32)씨는 몬트리올에서 6개월간 연수를 마친 뒤 토론토대로 옮겨 '비즈니스 영어' 코스를 밟았다. 중급 이상의 기본 실력을 필요로 하는 이 코스에서는 주식 용어 및 업무 계약시 사용하는 표현을 배우거나 회의 진행 영어를 익히기도 한다. 허씨는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기업인들과 만나 실제 업무에서 사용할 수 있는 현장감 있는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1년의 장기 연수를 계획하고 있는 학생들의 경우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라 섰다면 인턴십을 활용해 '현장'에서 영어를 배울 수도 있다. 또 일부 국가의 경우에는 워킹홀리데이 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
/박은형기자 voice@hk.co.kr
■ 권오량 서울대 교수
영어교육 전문가인 서울대 영어교육과 권오량(54·사진) 교수는 "어학 연수는 영어 학습의 동기를 유발하는 자극제는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영어 학습을 완성하는 수단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어학연수, 어떻게 가야 하나.
"각자의 여건에 맞추어야 한다. 정말로 자신이 공부하고자 하는 분야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회화도 있고 쓰기도 있다. 경제적 여건의 차이도 있는데 미국 이외에 비용이 저렴한 다른 국가도 있다. 여러 나라의 다양한 프로그램 중 자기 목적에 맞춰야 한다. 갔다 온 사람들의 이야기나 인터넷 정보를 참고하라. 한국학생끼리 단체로 나가는 것은 피해라. 중소도시를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학연수, 꼭 가야 하나.
"실제 현장에서 자극을 받는다. '내추럴 세팅'(Natural Settings) 효과다. 어쨌든 24시간 실생활에서 체험하면서 그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다. 젊은이로서 다른 세상에서 살아보는 것도 인생관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7, 8주의 짧은 연수라면 어학실력의 신장을 보장하긴 어렵다."
-국내에서도 가능한가.
"영어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하루에 30분이라도 집중 투자해서 하려는 의지가 있느냐이다. 짧은 기간 연수보다 장기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많은 학생들이 스스로 노력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기보다 여건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학원 교육의 폐해다. 외우는 것은 필요 없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언어는 기본적으로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연습을 하는데 노력을 투자하는 것이다."
-1년간의 연수를 통해서 어느 정도의 어학실력을 얻을 수 있나.
"1년은 '두려움'(Apprehension)을 극복할 수 있는 시기다. 1년 또는 조기유학 2, 3년은 일상영어를 배울 수 있는 시기다. 하지만 일상 영어의 습득과 영어 실력의 향상과는 다르다. 고교 이상의 전공과목 원서나 신문사설을 읽을 수 있는 수준은 'CALP'(Cognitive-Academic Liguistic Proficiency) 라고 한다. 회화만으로는 CALP에 도달하기 어렵다. 국내에서도 유창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표현이 고급스럽고 좋은 어휘를 많이 쓴다. 좋은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이다."
/박은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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