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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지식]<20> 역경의 달인 운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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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지식]<20> 역경의 달인 운허

입력
2003.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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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허야,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렴."내세에도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어디에 태어나길 원하는가.

"한국입니다."

-무슨 특별한 까닭이라도 있는가.

"역경불사를 계속하기 위해서 입니다. 한국에 다시 태어난다면 한 20세까지 글을 배운 뒤 중이 되어 부처님이 설하신 팔만 사천 법문을 한글로 옮기는 역경사업을 또 하고 싶습니다."

-역경불사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인고.

"해인사에 팔만 사천장의 보물이 쌓여 있지만 남의 나라 문자인 한문으로 돼 있어 일반대중에게는 한낱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나무토막에 불과합니다. 이 것을 대중에게 좀 더 가까이 갖다 주어 정말 무가보(無價寶) 구실을 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만약 운허 앞에 석가모니 부처가 나타나 소원을 묻는다면 틀림없이 이런 문답이 오고 갔을 것이다. 운허는 실제로 그런 말을 제자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번 생애의 여러 인연 때문에 나는 결코 다른 나라에서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침 저녁으로 염불을 하는데 이 땅에 다시 태어나서 금생에 못다한 역경사업을 내세에서라도 완성하게 해 달라는 서원이야." 운허는 예불을 전후하여 염주를 돌리며 주력(呪力)을 외우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염불은 대승불교의 중요한 수행법이다. 염불에 의한 견불, 이를 반주삼매(般舟三昧)라 한다. 부처를 향해 마음을 집중시키면 부처가 눈앞에 나타난다고 하는 굳센 믿음이다.

역경불사의 국고지원과 동국역경원 설치는 운허의 기도가 일궈낸 결실이다. 역경사업이 지지부진하자 운허는 영험하다고 소문난 도선사 석불전을 찾아 삼칠일 기도에 들어갔다. 한겨울의 매서운 삭풍과 눈보라도 일흔 셋, 노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운허의 염원은 그토록 비장했다. 운허의 참회기도는 역경사업이 궤도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재가불자로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을 맡고 있던 이후락이 이 소식을 듣고 청와대에 진정서를 내라고 조언을 한 것이다.

"좋은 소식이 왔다는 바람에 열나흘을 꼬박 채우지 못하고 내려왔더니 부처님이 깎으신 모양이야." 운허의 말에 제자들은 의아해 했다. "아, 계산을 해보면 모르겠느냐. 내가 하루 기도하는데 100만원씩 쳐서 열사흘을 꼬박 채웠으니 천삼백만원하고 그 다음 열나흘째는 하루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내려왔으니 오십만원만 쳐주신 것 같다는 말이야." 당초 정부는 1966년도 예산안에 1,400만원을 반영, 국회에 제출했는데 1,350만원이 책정된 것을 두고 이른 말이었다. 동국대 부설 동국역경원은 한글대장경 1집으로 '장아함경' 1권을 출간한 이래 오늘날까지 150여종에 이르는 한글대장경을 내놓았다. 운허는 역경불사를 위해 성불까지 미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경전의 바다를 통해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갔다. '깨달음은 말에 있지 않으나 말이 아니면 깨달음을 설명할 수 없다.' 옛 조사의 어록이다. 운허불교의 정수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항일정신이 운허용하(耘虛龍夏·1892∼1980)를 사문의 길로 이끄는 계기로 작용했다. "평생에 가장 기뻤던 일은 해방이 되었을 때인데 서른이 되도록 한 일이 독립운동 뿐이었으니 당연했다. 내가 중이 된 것은 서른 살 때 였는데 만주에서 서울로 잠입해 들어왔더니 고향인 평안도 정주에서 형사가 쫓아왔다. 그래서 금강산으로 피신하다가 그 길목인 강원도 회양 땅에 봉일사란 절에 들른 것이 숙연이었던지 참말 중이 되었다." 문도들이 펴낸 '운허선사어문집'에 실린 출가의 변이다.

운허는 당대의 걸승 월초(月初)를 만나면서 반야의 감로수에 젖어든다. 월초는 일본관헌에게 "조선총독이 내 수양아들"이라고 호통을 칠 정도로 기개가 대단했다. 양주 봉선사(현 남양주시)의 주지로 있던 그는 운허의 법기(法器)를 눈 여겨 보고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서울 근교 서오릉의 수국사도 월초가 창건한 사찰이다. 운허는 훗날 사촌형인 춘원 이광수로 하여금 불교에 귀의케 했다. 불교를 소재로 한 명작을 여러 편 남긴 춘원은 광복 후 운허가 봉선사 인근에 세운 광동중학교에서 한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월초의 문하에서 정진하던 운허는 경전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어간다. 경전은 운허의 심신을 살찌우는 더 없는 보약이었다. 일찍이 사서삼경을 익힌 운허에게 한문경전의 해독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절 집에는 글을 모르는 스님들이 많았다. 당연히 한문경전은 암호나 다름없었다. 운허는 그런 상황을 절실하게 인식하고 역경사업의 서원을 가슴에 간직했다.

"과거에 모든 부처님들은 보살행을 닦을 때 '이 공덕으로 모든 중생의 고통을 없애 주십시오' 하고 기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남이야 어찌 되든 오직 자기만을 잘 살게 해 달라고 빕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운허는 기복신앙을 가장 경계했다. 불자들에게 보시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나와 내 가족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 더 나아가 모든 인류가 골고루 잘 살게 되길 빌라고 가르쳤다. 더불어 자신도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하는 것, 나와 남이 깨달음을 원만히 실천하는 각행원만(覺行圓滿)의 성취를 기원했다.

한국전쟁은 운허의 가슴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피란을 가지 못한 운허는 부역자로 몰려 처형직전까지 갔다가 경찰서장과 국회의원 등 지역 유지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났다. 속가의 부인은 50년 12월 이승을 떠났고 딸과 사위, 아들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운허는 그러나 역경작업에 매달림으로써 모든 아픔을 삭인다. 운허는 입적 8년을 앞두고 월운(月雲) 등 제자들을 불러 미리 유언을 남긴다. "부디 자기 마음을 속이는 중노릇은 하지 말아라." 제자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한 유언이다. 80년 11월17일 운허는 봉선사에서 세수 89, 법랍 59세로 피안의 세계로 떠났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역경불사 법보시 한국의 구마라집

-그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석가)

"사문입니다."(수행자)

-사문은 무엇을 하는가.

"상락아정(常樂我淨)을 구합니다."

-그 것은 무엇인가.

"항상 즐겁고 모든 것을 자재(自在)하며 어떠한 더러운 것에도 물들지 않고 청정한 자기를 지키는 도리를 구하는 것이옵니다." 사문은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태자시절 석가모니는 어렴풋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에 눈을 뜬 뒤 틈만 나면 사색에 잠겼다. 그러던 어느날 저잣거리에서 머리를 깎고 허름한 옷에 맨발로 걷는, 괴이한 모습의 걸인을 발견하고 대화를 주고 받았다. 사문의 말에 석가모니는 출가를 결행하게 된다.

열반경에 나오는 상락아정은 열반에 따르는 4가지 덕을 말한다. 바로 열반사덕(涅槃四德)이다.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상은 열반이 시공을 초월하여 생멸변화가 없는 덕을 갖추고 있음을 가르친다. 편안하고 안락하다는 의미의 낙은 생멸변화가 없는 세계는 고통을 벗어난 적정무위(寂靜無爲)의 덕을 구비하고 있음을 말한다. 참나(眞我·진아)를 이르는 아는 집착에서 벗어나 무애자재한 진리의 덕을 의미한다. 청정하다는 뜻의 정은 번뇌망상을 남김 없이 소멸시켜 청정무구한 덕을 쌓았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열반은 육체적 소멸이 아니라 번뇌망상을 티끌 한 점 없이 여읜 깨달음의 경지다.

운허는 역경불사를 상락아정의 세계로 인도하는 반야의 배로 여겼다. 깨달음의 방편(方便)으로 삼은 것이다. 방편은 불가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방편은 중생이 부처, 즉 깨달음을 향해 가는 길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부처가 중생을 깨달음의 경지로 이끄는 길이기도 하다. 역경불사는 법보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법보시는 보시의 내용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친다.

운허를 한국불교의 구마라집(鳩摩羅什·343∼413)으로 평가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중앙아시아의 도시국가 쿠차 출신인 구마라집은 중국 역경사상 최고의 번역가로 중국불교 흥륭의 토대를 마련했다. 쿠차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구마라집은 7세에 출가했다.

그가 중년에 이르렀을 때 중국 전진(前秦)의 왕 부견이 쿠차에 침입, 포로로 잡아갔다. 부견은 구마라집을 통해 중국불교를 진흥시키려 했다. 전진이 망하면서 구마라집은 후진(後秦)의 왕 요진(姚秦)의 호의로 장안에 머물게 됐다. 57세의 구마라집은 13년간 법화경과 아미타경을 비롯, 수많은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구마라집의 역경은 오늘날까지 사상적으로나 표현 면에서 가장 탁월한 번역으로 평가받는다.

● 연보

1892.1.25. 평북 정주출생, 속성은 전주 이(李)씨

1904 결혼

1913 만주에서 대동청년당 가입

1921 일경을 피해 봉일사에서 출가,

법호는 운허, 법명은 용하

1946 광동중학교 설립, 교장 취임

1952 범어사 강사로 있으면서 능엄경 번역 착수

1959 봉선사 주지 취임

1961 한국불교사상 첫 불교사전 편찬

1964 동국대 역경원 설립, 원장 취임

1980.11.17. 봉선사에서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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