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술 공부를 위해 도쿄로 유학을 떠난 건 1938년 봄이었다. 부모님이 미술 공부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했을 때 내건 조건이 도쿄미술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처음부터 이 학교를 염두에 두고 준비를 했다. 현재 일본 국립 도쿄예술대학의 전신인 이 학교는 5년제(예과 1년, 본과 4년)였으며 당시 일본 유일의 관립미술학교로 최고 권위를 자랑했다. 정규미술학교가 없던 식민지 조선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선망한 학교였다. 아버지는 군수를 그만둔 후 소작농을 두고 농사를 짓던 때여서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는데, 나는 돈을 아껴쓰겠다는 약속을 하고 도쿄로 향했다.나는 우선 입시 전문학원인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 데생연구소에 등록했다. 그 때 마침 입시를 앞둔 때라 수험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대부분 2·3년 째 공부하고 있었고 4·5년씩 공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때까지 유화만 그려본 나는 입시 필수 과목인 석고 데생을 처음으로 배우며 어리둥절했다. 이젤 앞에 앉으니 어디서 무엇부터 그려야 할지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차츰 연구소 생활에 익숙해지고 다른 연구생들과도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운동장이 없는 이 연구소에서는 쉬는 시간이면 모두 모여 앉아 팔씨름으로 힘 자랑을 했다. 그때만 해도 힘이라면 자신이 있던 나는 순식간에 강자로 떠올랐다. 따라서 모든 학생들이 나를 이기려고 앞 다투어 덤벼들었다. 몇 사람을 제치고 한 친구와 손을 맞잡고 힘을 주는 순간 '욱'하면서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밖으로 뛰쳐나가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냈다. 순간 함흥고보 다닐 때 한 친구가 수업시간에 그렇게 피를 토한 후 몇 달 후 죽은 일이 떠올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집에서 한 달에 30원을 받았는데 월사금, 방세, 식비, 교재비 등으로 쓰면 한 푼도 남지 않았다. 지금 돈으로 10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지내다보니 허기가 질 수밖에 없었다. 대식가인 나로서는 식당밥이 부실해 늘 배가 고팠고, 영양실조로 병까지 걸렸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실을 어머니께 알렸더니 즉시 돈을 늘려 한 달에 40원씩 보내 주셨다. 그때부터는 작은 아파트를 얻어 자취를 하면서 마음껏 음식을 먹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체력이 회복됐고 체중이 100㎏에 이르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때의 병은 급성 폐결핵으로 X선 촬영결과 폐에 작은 구멍까지 나 있었다. 하지만 워낙 음식을 잘 먹은 덕에 약 한 첩 쓰지않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완치됐다.
1939년 처음으로 치른 시험에서 나는 1년 내내 고생한 보람도 없이 보기 좋게 떨어졌다. 쓰린 가슴을 안고 귀국해서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조선미술전람회를 관람한 후 느지막이 도쿄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도시락을 두개씩 싸 들고 다니며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그림을 그렸다. 집에 돌아와 11시부터는 학과 공부에 매달려야 하니 하루 취침시간은 3시간 정도였다. 이때부터 나에게는 하루 3시간씩 자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 노력 덕분에 데생 실력은 일취월장(日就月將)했다. 당시 도쿄미술학교 교수이며 예술원 회원이던 미나미 군조 선생에게 그림을 들고 찾아갔을 때는 "이만하면 됐다"는 말을 들었다.
마침내 실기 시험치는 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교실에 들어섰다. 실기 시험은 석고상을 목탄으로 하루 3시간씩 이틀간 그리는 것이었다. 데생은 석고를 바라보는 위치가 좋아야 한다. 역광이 비친다거나 볼륨을 내기 어려운 정면, 또는 광선의 변화가 없는 곳에서는 그리기가 영 힘들다. 석고의 얼굴이 7대 3의 비율로 정면을 피하고, 얼굴 방향이 좌측을 향하고 있으면서 명암이 뚜렷한 자리가 가장 좋다. 자리는 제비뽑기로 결정했는데 그날 나는 운이 좋았다.
결과는 합격, 그것도 수석이었다. 도쿄에 온 지 2년 만에 도쿄미술학교 유화과에 들어간 것은 내가 생각해도 놀라웠다. 이때 같이 합격한 친구가 바로 40여년 전 고인이 된 이달주이다. 연구소에서는 수석 합격한 나를 개선장군처럼 맞아주었다. 바로 전해에 우리 연구소와 경쟁 관계에 있던 학원에 수석을 빼앗겼다가 다시 되찾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미술학교 진학에 가장 반대했던 형님이었다. 형님은 관보(官報)에서 보았다며 장문의 축하편지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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