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당국이 시민과 인권단체·언론의 집단 반발을 불러 일으킨 국가안전법 입법을 전격 연기키로 한 것은 홍콩의 앞날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우리의 국가보안법 격인 홍콩의 국가안전법은 기본법(헌법)23조에 따른 것으로 반역죄와 국가 전복 및 국가기밀 절취 등에 대한 처벌규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법 조항이 구체적이지 않은데다 정부가 자의적으로 판단할 경우 인권 침해소지가 많다. 파동은 새로 출범한 후진타오(胡錦濤)체제의 홍콩 정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국제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 홍콩의 최고 책임자인 둥젠화(董建華) 행정장관은 법 통과를 위한 입법의회 소집을 하루 앞두고 꼭두새벽에 연기를 발표했다. 7일 새벽 넥타이도 매지 않은 차림으로 긴급 행정회의(내각)를 소집한 결과이다. 회의가 너무나 급히 열리는 바람에 각료들은 대부분 캐주얼 차림으로 자가 운전을 해 회의장에 와야 했다. 불과 하루 전 까지만 해도 독소조항의 일부를 수정해 예정대로 통과시키겠다고 호언 했던 것과는 딴 모습이다. 베이징 역시 통과시킨다는 입장을 재확인 하고 있었다.
■ 급반전의 결정적 계기는 1일에 있었던 대규모 군중시위. 680만 홍콩인구 중 50만명이 참석한 시위는 한 목소리로 법의 철회를 요구했다. 이날은 홍콩의 중국반환 6주년 이기도 했다. 이 집회는 1989년 베이징의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에서 있었던 최대 시위였다. 시위는 반대여론을 결집시켰고 결정권을 쥔 입법의회 의원들을 움직였다. 60명의 입법의원 중 과반 이상의 반대가 확인되자 둥젠화 장관은 두 손을 들어야 했다. 시위는 연기 결정 후에도 계속되면서 둥젠화의 퇴진과 행정장관과 입법의원 직선제를 요구하는 등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 보안법 파동은 영국의 통치아래 자유와 풍요를 구가하던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때 예고된 사건이었다. 중국은 홍콩의 민주개혁을 약속했지만 사회주의체제라는 내재적 한계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체제의 장점을 체험한 홍콩 주민들이 베이징의 통제에 순순히 응할 리가 만무하다. 베이징은 코 앞에서 벌어진 천안문사태는 무자비하게 응징했지만, 14년이 지나 이역만리 홍콩에서 촉발된 민주화 요구에는 손을 쓰지 못했다. 베이징은 특별 조사팀을 은밀히 홍콩에 보내 야당 지도자를 접촉하는 등 수습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인책설이 구체화 되는 둥젠화 장관이 파동을 헤쳐나갈 수 있을지 여부와 후진타오의 새 중국지도부가 홍콩을 어떻게 다룰지 지켜 볼 일이다.
/이병규 논설위원 veroic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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