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미측에 사용 후 연료봉 재처리 완료를 통보하고, 미측이 재처리를 입증할 단서를 확보함으로써 북미간 핵 대치 상황이 새 국면을 맞고 있다.미국이 핵 재처리를 '넘어서는 안될 한계선'으로 인식해왔다는 점에서 두 사실은 표면적으로 북미 관계를 더욱 얼어 붙게 할 변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양측의 대치가 극한에 이를 때 대화를 모색하는 것은 북미 관계의 또 다른 양상이다. 북한이 핵 줄타기의 위험을 깨닫고, 미국이 북한의 위협을 무시하는 정책의 한계를 인정하게 될 때 대치를 피할 질적 변화를 꾀할 여지가 있다.
우선 북미가 급랭의 조짐을 띨지, 대화의 전기를 마련할지는 미국이 북한의 현 재처리 상황을 '새로운 위협'으로 받아들이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재처리 완료 주장은 미국에게는 익숙해진 북한의 핵 목록 중 하나다.
북한은 베이징(北京) 회담을 앞둔 4월 18일 "사용 후 연료봉에 대한 재처리 작업이 마지막 단계에서 성과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발표한 이후 수 차례 같은 사실을 언급해 왔다. 따라서 이번 통보는 외교 창구를 통해 미측에 기존 주장을 공식화한 것 외에 충격을 줄 만한 내용은 아니다.
오히려 미국이 현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영변 재처리 시설 부근에서 크립톤 85를 검출했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의 재처리 완료와 핵 억지력 확보 주장이 수사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미 정부 기관들은 크립톤 검출 등을 백악관에 종합 보고한 것으로 알려져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아프리카 순방에서 돌아오는 13일 이후 대응책이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북한을 '으르고 달래온'미국의 정책 골격이 크게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미국은 상수(常數)이고 북한만이 변수"라고 말했다. 미국은 당분간 유엔 안보리 의장 성명 채택, 북한 선박 해상 저지 등 압박책과 다자회담을 통한 대화 노력을 병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8일의 뉴욕 채널 가동은 미국의 뜻이 북한을 몰아세우는 데만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은 이번 접촉을 통해 북한이 다자회담을 수용, 핵 폐기에 대한 명백한 의사를 밝힐 경우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을 약속할 수 있다는 뜻을 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도 선(先) 북·미 양자회담 주장을 굽힌 것은 아니지만 다자회담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제시함으로써 핵 재처리 통보의 숨은 뜻이 협상에 있다는 점을 감추지 않았다. 지금은 대화와 대치의 양 극단에서 서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입장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는 단계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 核 재처리란
핵 재처리는 발전용으로 쓰고 난 연료봉에서 남아 있는 플루토늄(Pu) 등 유효성분을 화학적으로 추출해내는 작업이다. 원자로에서 우라늄(U238)이 중성자를 흡수하면 Pu239로 전화되는데 원자로를 일정 기간 가동하면 핵무기 원료인 Pu239이 축적된다.
Pu239는 사용 후 연료봉을 5㎝ 길이로 절단해 용해조에 넣은 뒤 용매추출 방식으로 분리해 내는데 순도가 93% 이상이어야만 핵무기 제조에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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