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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5> 첫 사랑, 첫 누드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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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5> 첫 사랑, 첫 누드 ③

입력
2003.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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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린 본격적 첫 누드화는 '나부군상(裸婦群像)'이었다. 대중 목욕탕에서 다양한 포즈로 몸을 씻는 6명의 여인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200호 크기의 야심작이었다. 이 그림은 1949년 제 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입선했으나 '풍기문란'이라는 이유로 전시장에서 철거되고 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엄청난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예술과 외설의 논쟁을 부른 일대 사건이었다. 그 전말은 이렇다.이 그림을 그린 건 내가 선린상고와 신설된 정신여고에서 전임교사로 있을 때였다. 당초 선린상고 시간강사이던 나는 전임이 되면서 정신여고를 그만두려 했으나 이 학교에서도 전임 대우를 해줘 두 학교에 모두 나가면서 월급도 두 곳에서 받게 됐다. 당시는 대학 교수보다 고등학교 교사의 월급이 더 많았다. 학부모들의 후원회비가 각종 보너스로 지급됐기 때문이었다. 월남하여 경제적으로 어렵게 지내던 나로서는 비로소 그림을 그리고 싶은 의욕이 샘솟았다. 정신여고에서는 넓은 교실 하나를 화실로 쓰고 있어서 여건이 좋았다.

일제 하에서 일본인들 주도로 치러지던 조선미술전람회(선전)가 1944년 제23회 대회를 끝으로 폐지되고 5년 만에 생긴 국전은 미술인들에게 최고의 관심거리였다. 나도 첫 국전에서 미술사에 남을 수 있는 작품을 내놓아야 하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궁리 끝에 결정한 것이 여인들의 집단 누드화인 '나부군상'과, 조선시대 도자기를 모아놓고 그린 정물화 '호(壺)'였다. 정물화는 내가 즐겨 그린 그림이었다. 밤새워 그림을 그리는 습관이 있는 나로서는 언제 어디서든 그리고 싶을 때 그릴 수 있는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더 애착을 가졌던 것은 '나부군상'이었다. 몇 달 동안 밤잠을 설치며 작업해 출품하고 발표를 기다렸다. 마침내 11월 21일 경복궁미술관에서 입선작이 발표됐다. 결과는 '호(壺)'가 특선을 했고 '나부군상'은 입선에 그쳤다.

그런데 전시장에는 '나부군상'이 보이질 않고 그 자리에는 '당국의 지시에 의해 전시 철회함'이라는 문구가 걸려있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니 당시 문교부장관이며 국전 회장인 안호상씨의 지시로 작품이 철거된 것이었다. 안씨는 국전심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심사장에 들어와서 '나부군상'을 입선시키지 말라고 요구했고, 심사위원들은 아무리 장관이라도 그런 식으로 심사에 개입할 수 없다고 반발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소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타블로이드판 4쪽 짜리 일간지인 국도신문은 23일자에 '양립되느냐? 예술과 윤리'라는 제목 아래 7단 크기의 톱기사를 내보내고 작품 사진과 함께 각계 반응 및 안 장관의 해명을 실었다. 안 장관은 "미술적 가치는 인정하지만 미성년자에게 재미없는 영향을 미칠까봐 심사위원들과 협의해서 철회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도신문은 이 기사가 나간 다음날인 24일 1면 사고를 통해 전시가 보류된 작품의 사진이 게재된 데 대해 사과하는 기사를 내야 했고, 1주일간 정간조치까지 받았다.

이때 한 기자가 안 장관에게 다른 누드화도 있는데 왜 '나부군상'만 문제 삼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다른 나부화는 여자모델 한 사람을 놓고 그렸지만 그 작품은 6명이나 되는 여자 모델을 한꺼번에 벗겨놓고 그렸잖소. 그걸 그릴 때 그 작가의 정신상태가 정상이었겠소?" 이 기자가 "누드 모델은 한 사람이었고 여러 포즈를 취한 것"이라고 설명하자 안 장관은 얼굴이 붉어졌다고 한다.

이후 예술계의 반발이 거세지자 당국도 수습에 나섰다. 이범석 국무총리는 시상식장에서 자신이 미리 알았으면 그런 불상사가 없었을 것이라고 사과했고, 임병직 외무부장관도 나를 두둔했다. 나는 집단 누드화를 시도한 것 자체가 당시 사회의식보다 너무 앞서갔다는 생각도 들기는 했지만, 한 나라 장관의 식견이 그 정도였다는 게 지금도 실망스럽다.

'나부군상'의 운명은 끝까지 비참했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나는 이 작품을 선린상고 관사에 두고 피란을 갔는데 돌아와 보니 나부 하나하나가 가위로 잘려나가 캔버스 틀만 남아있는 것이었다. 학교에 주둔했던 군인들이 오려간 것이다. 국전 첫해 최고상을 기대하며 그렸던 이 작품은 결국 햇빛도 보지 못한 채 전란의 와중에 이런 종말을 맞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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