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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4> 첫 사랑, 첫 누드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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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4> 첫 사랑, 첫 누드 ②

입력
2003.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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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꺼낸 김에 여성과 누드에 대한 내 생각들을 좀더 털어 놓아야겠다. 앞서 말한 대로 여성이 없었다면 내 예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실생활에서도 여성이 없는 자리란 사막과도 같다. 미술학교를 나와 얻은 첫 직장이 여고였고 그 뒤로 근무했던 곳도 이화여고 정신여고 성신여대 덕성여대 등 주로 여학교였기에 그렇게 됐는지도 모른다.예쁜 여성을 흔히 꽃에 비유한다. 그러나 나는 여인이 꽃보다 훨씬 아름답다. 나는 꽃을 보면서 그리고 싶은 의욕을 느껴본 일이 별로 없다. 때문에 꽃은 정물화의 흔한 소재이지만 내 그림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꽃은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대상일 뿐이다. 꽃은 나의 정을 받아주지도 않고, 나의 감정에 반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여성은 감정을 주고 받는 능동적인 대상이다. 나체가 주는 성적 매력에 비하면 꽃은 아무리 예뻐도 목석에 불과하다.

내가 여성의 나체를 처음 본 건 1938년, 열아홉살 때였다. 나는 당시 함흥고보를 마치고 도쿄미술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일본 도쿄의 데생연구소인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 연구소는 미술학교 입시생들에게 데생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원이다. 누드화 교실에서 본 그 여성은 직업 모델이었다. 그때 교실은 모두 호흡을 멈춘 듯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고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까지 석고데생만 해오던 나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여체의 부드러운 살결은 차가운 석고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천장 창문을 통해 들어온 자연광선에 싸인 풍만한 굴곡은 금세 내 눈 속으로 빨려 들어 왔다. 내가 오늘날까지도 여체의 아름다움을 찾아 끈질기게 파고드는 것은 바로 그날 받았던 감동이 내 가슴을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해 여름 방학이 돼 고향 함흥으로 돌아가서도 그 여인의 잔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옷 속에 그런 예술작품이 숨어있다니…. 집에 머물게 된 나는 제대로 된 누드화를 그려보려 했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처녀가 남자 앞에서 옷을 벗겠다고 나설 리도 없고, 시골 도시에 직업모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회는 쉽게 찾아왔다.

당시 나는 함흥 일대에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고보 때 이미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기 때문에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아버님이 군수를 지내셨고 내가 도쿄에 유학까지 하고 있었으니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고 아는 척했다. 특히 미술에 관심이 있는 여학생들에게 기골이 장대하고 야성미 넘치는 나는 단연 인기였다.

이 즈음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여성이 있었는데 이웃 동네에 살고 있는 희숙이라는 이름의 여인이었다. 날씬한 몸매에 눈이 크고 피부도 하얀 서구적 이미지로 당시 함흥 남성들의 뜨거운 눈길을 한 몸에 받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 전에는 그냥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였는데 방학 중에 귀국한 뒤로 더욱 가까워졌다. 어느 날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에게 뺨이라도 한대 맞을 각오를 하고 모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그녀는 내 이야기를 생글생글 웃으면서 듣고 있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그녀와 함께 우리 집으로 갔다. 그때 우리 집은 방이 15칸에 이를 정도로 컸다. 그 중 내 작업실로 쓰는 방으로 안내해 들어갔다. 희숙도 선뜻 허락은 했으나 몹시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여성이 잘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젊은 남녀의 교제가 금기시되던 시절에 낯선 남자의 방에 들어가는 것도 그런데 더욱이 옷을 벗어야 하는 게 평생 멍에를 지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 당연했다. 마침내 내가 캔버스 앞에 앉고 그녀는 돌아서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붓을 쥔 내 손이 가볍게 떨리며 입안이 마르는 순간, 온 몸이 빨개진 그녀가 내 앞에 섰다. 그러나 그녀의 몸매는 내가 기대했던 그런 곡선이 아니었다. 한복을 입고 다닐 때 그토록 날씬하게 보였던 몸매는 사라지고 뼈만 앙상한 여체였다. 나는 크게 실망했다. 어쩔 수 없이 양해를 구해 옷을 입혀 그렸다. 그 작품이 바로 '희숙의 상'이다. 나는 이 그림으로 제18회 선전(鮮展)에서 두 번째 입상을 했다. 하지만 그 동안 습득한 데생 실력을 확인해 주었을 뿐 멋진 누드작품을 만들어 내려던 내 꿈이 깨져 못내 아쉬웠다. 내가 애틋한 감정을 느껴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던 그녀와의 관계가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이 더욱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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