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전세계에서 가장 문명화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자. 그 일은 바로 아픈 사람들의 복지를 그 어떤 일보다 먼저 고려하는 것이다."1948년 영국의 보건부장관 베번이 영국의 새로운 의료제도인 국영의료서비스(NHS)를 출범시키면서 남긴 말이다. 이 제도는 그 때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국민은 서비스를 받는 시점에는 어떤 경제적 부담도 하지 않는 혁신적인 제도였다.
최근 국민소득 2만불 구호가 언론을 장식하는 것을 보면서 50년도 넘은 영국 의료제도의 혁신을 되새기는 심정은 착잡하다. 의료제도의 내용 때문이 아니다. 혁신의 환경과 비전이 우리를 좌절케 한다. 2차 대전 직후의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름 아닌 '문명'을 논하면서 의료제도의 혁신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어떤가. 국민의 에너지를 구태의연한 구호로 결집하려는 발상도 놀랍지만, 30여년 만에 다시 꺼낸 카드가 국민소득이라는 헌 칼이다. 뒤따르는, 성장이 가장 확실한 복지라는 논리도 전혀 낯설지 않다.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상황논리도 물론 빠지지 않는다.
1만5,000불도 좋고 2만불도 좋다. 경제성장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가 모를까. 그러나 국가발전의 목표가 이렇다는 소리는 경제가 중요하다는 주장과는 한참 다르다. 다른 가치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선언이며, 동시에 성장의 성과는 일부에게 독점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보면 '2만불 국민소득'의 비전은 30년 전 '1,000불 국민소득'의 구호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사회적 약자, 병든 자,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또 다시 기다리라는 것인가. 파이가 한참 더 커질 때까지?
사회통합 없이 건전한 사회발전은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만 해도 경제성장 지상의 발전전략이 초래한 부작용을 치유하느라 지금도 적잖은 사회적 자원을 투자하고 있다. 솔직히 국민소득 운운하여 잠깐의 최면효과나 있을지 의문이다.
세계사의 경험으로도, 우리 역사의 반성으로도 국가발전의 전략은 명확해야 한다. '복지친화적'이고 '통합지향적'인 성장전략이 아니고선 안 된다. '선(先)성장 후(後)분배'로는 누구도 국가발전의 대열로 끌어낼 수 없다. 하물며 발전의 목표가 경제 자체가 아니라 '문명'인 바에야.
/김창엽·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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