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마을 숲은 대부분 그 마을에 닥쳐오는 재앙을 막거나 경관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풍수지리적 의미에서 조성됐다. 하지만 충남 천안시 성환읍 와룡리의 숲은 좀 다르다.와룡리는 전형적인 농촌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 야트막한 산자락은 온통 축산연구를 위한 가축 방목지인 목초지다. 그 가운데 약간 도드라져 있는 1㏊ 정도의 면적에 오래된 집 한 채와 우리나라 자생수종인 참나무, 서어나무, 전나무, 산벚나무와 일본이 자랑하는 금송, 화백, 그리고 유럽의 독일가문비나무 등을 심어 인공으로 조성한 숲이 있다.
일제가 조선의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한 다음해인 1909년 동양척식회사 사장의 별장으로 수원과 천원군에 있던 호화주택인 판서집을 뜯어 이 곳으로 옮겨 재건축하고 거기에 정원용 숲을 조성한 것이다. 여기에 재조립된 건물의 외형은 조선시대의 전통적 대감집이지만 내부는 일본식으로 개조하여 취원각(翠遠閣)이라 이름을 지었다. 양반가 주택으로서 기풍은 있으나 지금은 관리가 되지 않아 사람이 살수 없을 만큼 많이 훼손됐다.
취원각을 지은 뒤 가운데 정원에는 단풍나무를 심었고, 건물 앞에는 전나무를, 그리고 건물 주변에는 일본 원산의 금송을 심었다. 나무를 심을 당시 40년생 이상의 큰 나무를 심었기에 이 정원의 숲은 대부분 나이가 140년생 이상의 오래된 나무로 구성되어 있다.
정원 가운데에 있는 단풍나무는 지면에서부터 여러 개의 줄기가 나와 우산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높이가 7m, 수관폭이 13m 정도로 지금도웅장한 자태를 뽐낸다. 건물 앞쪽에는 진입로 형태로 나란히 심어져 있는 전나무들이 높이 20m, 직경 60㎝ 정도로 자라고 있어 질서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 틈새에 새들이 종자를 날라와 뿌리를 내린 듯한 말채나무가 하얀 꽃을 피운다. 건물 주변에는 일본이 원산지이며 세계 3대 조경수로 꼽히는 금송과 금편백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건물 동쪽에는 보통은 식물천이의 극성상(極盛相)에서 볼 수 있다는 서어나무를 식재하여 이채로운 경관을 연출하고, 이른 봄 산지에서 꽃과 잎이 동시에 피는 경관수목인 산벚나무도 있다. 그 곁에는 오래전 미국에서 도입되어 식재되었으나 강건너 불 보듯이 뒷전에 밀려 있던 튤립나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곧고 우람하게 자란다. 취원각 뒤편의 서쪽 사면에는 소나무 천연림이 보존되어 있으나 점차 쇠퇴하여 상수리나무가 그 사이를 비집고 상당한 면적에 여러 개체가 자라고 있는데 그 중의 한그루는 수고 17m, 가슴높이 직경 80㎝ 정도로 지금까지 조사된 상수리나무 중 가장 큰 거목으로 기록될 만하다.
상수리나무는 그 열매를 원래 도토리라고 하는데 거기서 생산되는 녹말가루로 만든 도토리묵이 임금님의 수라상에 오른 덕분에 도토리가 상수라 또는 상수리로 이름이 붙여졌다는 유래가 있다. 도토리묵은 지금은 가을에 도토리 열매를 모아 녹말가루를 만들어 놓았다가 특별한 날 집안에서 만들어 먹는 별미 음식으로 자리잡고 있으나 식량이 부족한 시절 도토리가 구황식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마을 주변의 상수리나무는 한발이라도 먼저 도토리를 수확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돌이나 떡을 치던 메(떡메)로 줄기를 맞는 수난을 당했다. 그 흔적이 여기의 상수리나무에도 남아 있다. 그 부분이 패여 썩어가고 있었다. 이제 취원각의 주인은 떠나고 없고 와룡리 상수리나무의 패여 있는 흔적을 보니 선조들의 배고픔을 새겨놓은 듯해 가슴을 저민다.
/최명섭 임업연구원 박사 hnarbore@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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