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잇단 노조 파업을 계기로 경제의 사활이 건전한 노사관계 모델을 정립하는 데 달렸다며 어지러운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경제 전문가와 언론까지 상식을 비웃는 논리를 정색한 채 떠드는 판에 합리적 결론이 나올 리 만무하다. 후진적 노사 관계 자체보다, 몰이성적 논쟁 태도가 이 사회를 정말 희망 없는 수렁으로 몰아갈 것이란 비관마저 든다.적대적 노사관계 때문에 경제가 멍들고 있다는 주장은 흔히 스위스 국제경제개발원(IMD)이나 세계경제포럼(WEF)의 국가경쟁력 평가를 논거로 삼는다. 이를테면 올해 IMD 평가에서는 우리 노사관계의 적대성이 인구 2,000만 이상 30개 국가 가운데 가장 높아, 이 부문 경쟁력 최하위로 평가됐다. 그러나 IMD 평가는 기업 경영자 설문조사가 중심이어서, 국가경쟁력을 기업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 맹점이다. 또 노사관계는 수백 개 지표에 바탕한 수십 개 평가 항목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특히 IMD는 우리 기업 구조 및 경영의 투명성에 관한 여러 항목을 역시 최하 수준으로 평가, 국가경쟁력을 위해 가장 시급히 개선해야 할 부문으로 지적했다. 이를 외면한 채 노조 때문에 경제가 망한다는 듯이 개탄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아가 중남미가 저 지경이 된 것도 노조 탓으로 치부하는 것은, 제국주의 침탈의 유산에 고통받는 중남미의 비극을 비웃는 역사 왜곡이다.
적대적 노사관계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네델란드 모델이니 유럽 모델이니 영미 모델이니 저마다 떠들며 다투지만, 여러 모델의 특성 또는 장단점을 제 편한 대로 규정하는 것은 우습다. 정부쪽에서 네델란드 모델을 거론하자, 경제계는 물론이고 보수적 학자들과 언론이 우리와 토양이 다르다며 영미식을 내세우는 것은 자기 모순이다. 영미식이 우리 토양에 더 잘 맞는다는 근거도 없지만, 유럽 모델보다 대립적인 영미 모델을 앞세우는 것은 적대적 관계 개선이란 과제와 동떨어진다.
영미 경제모델이 1990년 대 중반이래 신자유주의 물결을 타고 득세하는 듯한 추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IMD와 WEF의 경쟁력 평가 자체가 신자유주의 논리에 맞는 기준을 적용한 것이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프랑스 스칸디나비아 3국 등 전통의 유럽 모델 국가들은 여전히 총체적 경쟁력에서 영미 모델과 어깨를 견주고 있다.
특히 노사관계 모델에서 영미식이 앞선다는 증거는 없다. 네덜란드와 핀란드 등이 임금인상 억제와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 등 신자유주의 요소를 수용해 경제 난국을 벗어 났지만, 완벽한 복지제도와 노사간의 신뢰·협조 등 유럽 모델의 근간은 변함없다. 그 유럽 모델의 전형인 독일 경제가 경기 침체와 구조적 경직성 때문에 고전한다고 해서, 노조 때문에 경제가 기울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단적인 예로, 독일의 노조파업에 따른 노동시간 손실은 영국과 미국의 몇 십, 몇 백 분의 일에 불과할 정도로 노사 관계는 안정돼 있다.
유럽 모델의 '산업 평화'는 산업 혁명이래 치열한 계층 갈등을 경험한 끝에 사회적 대타협을 이룬 지혜의 산물이다. 독일의 경우 1870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유럽에서 가장 앞선 복지 입법을 선도하고, 노사협의회를 승인한 것이 바탕이다. 그러나 2차대전후 독일을 점령한 영국이 영국에서는 이미 불가능한, 노사간 힘의 균형과 공동의사 결정을 축으로 하는 합리적 노사관계의 법적인 틀을 강제한 사실은 기로에 처한 우리에게도 시사적이다.
물론 서구가 선망하는 독일의 노사 화합도 법과 원칙에 철저한 규제가 뒷받침한다. 그러나 그 법적 규제에는 엄격한 파업 절차 등과 더불어, 6주 이상 병가중인 근로자에게는 고용주가 위문 꽃다발을 보내야 한다는 규정까지 있다. 이를 코믹하게만 여기는 인식으로는 우리의 모델 논쟁은 공허할 수 밖에 없다.
강 병 태 편집국 부국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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