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만권의 책이 아니라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노동자에게서 철학을 깨우쳤다."백기완(70) 통일문제연구소장이 떠올린 인연의 대상은 그가 성도 이름도 모른 채 "가대기 형"으로 불렀던 어느 막노동꾼이다. 시대의 주먹 김두한과 '맞짱'을 떠서 무릎을 꿇게 만들었으면서도 폭력을 혐오했던 가대기 형은 백 소장에게 민중이 무엇인가를 깨우쳐주었다.
백 소장이 가대기 형을 알게 된 것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서울역 앞에서였다. 원래 가대기란 어깨에 짐을 져 먹고 사는 일꾼을 일컫는 말로, 지게꾼보다 노동조건이 열악한 최하층의 노동자다. 당시 가대기 형은 20대 중반으로 서울역 주변에서 짐을 나르는 일을 했고, 백 소장은 13세의 나이에 고향 황해도에서 부친 백홍열(작고)씨를 따라 서울에 왔다가 헤어지고 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그 해 겨울바람이 매섭던 어느 날 서울역 앞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
가대기 형과 김두한이었다. "김두한이가 짐꾼들을 협박해 철로를 떼어 팔려고 하고 있었지. 물자가 귀하던 시절에 돈이 됐거든. 일꾼들 모두가 보복이 무서워서 떠는데 가대기 형님만 못하겠다고 버틴거지."
김두한은 싸움꾼답게 가대기를 묵사발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6척 장신의 가대기도 쌀가마를 지어 나르며 단련된 몸이었다. 기회를 엿보던 가대기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김두한을 번쩍 들어 올렸다. 김두한은 중절모를 떨어뜨리며 허공에서 발버둥을 쳤다. 가대기가 김두한을 철로로 패대기를 치려는 순간 김두한이 외쳤다. "살려주십쇼.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김두한은 정말로 무릎을 꿇었다. 이 싸움은 김두한의 보기드문 패배로 알려져 있다.
백기완은 가대기 형으로부터 싸움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어느 날 백기완은 서울역 옆 피난민수용소에서 '살구'라는 친구와 "이(蝨)를 누가 옮겼느냐"로 시비를 벌이다 주먹다짐을 했다. 백기완이 살구를 두들겨 패고 있을 때 가대기 형이 나타났다. 백기완이 "형, 내가 이겼지?"하고 으스대자 가대기 형이 이렇게 말했다. "이 밖에 없는 빈털터리 끼리 싸움을 하면 서로가 죽는다. 싸움은 나쁜 놈들과 하는 거야."
알고 보니 가대기 형의 부친은 독립 운동가였다. 가대기 형에게 서울역 철로는 남과 북을 잇는 통일의 길이었고, 그 철로를 뜯어내는 짓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반민족 행위였다. "가대기 형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나 역시 싸움이나 일삼으며 지냈을 지도 몰라요."
가대기 형은 백기완에게 박애정신이 무엇인지도 가르쳐주었다. 가대기 형은 굶주린 백기완을 남대문 길거리 밥집에 데려가 동태 머릿국을 사 먹이곤 했다. 돈이 없어서인지 가대기 형은 늘 한 그릇만 주문해 백기완이 혼자 먹도록 했고 자신은 허공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그 자신도 배가 고프지만 참는 눈치가 역력했다.
가대기 형과의 만남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가대기 형이 보이지않아 찾아 나섰어요. 수소문 끝에 영등포의 어느 건물 지하실에 들어서니 가대기 형이 홀랑 벗겨져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더군요. 몽둥이, 주전자, 칠성판이 널려 있었지요."
가대기 형은 철도파업에 동조한 빨갱이로 몰려 고문을 당한 것이었다. 백기완은 가대기 형을 부축해 그가 기거하던 공덕동 판자집에 데려다 주었다. 가대기 형의 어머니가 병든 몸으로 거적대기에 누워 있었다. 백기완은 얼마 후 그 집을 다시 찾았지만 가대기 형은 없었고 그 이후로 지금껏 50년이 넘게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
백 소장은 가대기 형과의 짧고 깊은 인연이 너무도 절절해 이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냈다. 94년 발표한 창작 시나리오 '단 돈 만원'이 그것이다. '단 돈 만원'에서 가대기 형은 민중 운동을 주도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백 소장은 서울역이나 영등포에 가대기 형을 기념하는 시비(詩碑)를 세우려 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아직까지 이루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과 세상을 생각해야 한다는 가대기 형의 가르침은 지금도 내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어요. 가대기 형을 통해서 나라와 민족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지요."
/이민주기자 m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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