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에 걸쳐 진행된 '신 러시아의 중심, 상트 페테르부르크' 기획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수도였던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소련 붕괴 이후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상황에 주목해 이를 러시아 전체의 변화 움직임과 연결시켜 보려는 시도에서 마련됐다. 기획에 함께 참여한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는 2002년 학술진흥재단(이사장 주자문) 기초학문육성지원사업으로 선정된 '21세기 상트 페테르부르크 재조명' 연구과제를 수행하고 있다. /편집자주
1991년 9월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건설 당시의 이름을 되찾은 이후, 옛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가 아닌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신생 러시아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20세기 내내 수도 모스크바로 지내온 터에 이런 주장이 달가울 리 없는 모스크바 시민들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이런 긴장관계는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역사상 러시아의 중심지는 크게 보아 여섯 번에 걸쳐 이동했다. 862년 류릭에 의해 최초의 러시아 국가가 세워진 노브고로드에서 2대 통치자 올레그에 의해 점령된 키예프(현 우크라이나 수도)로 러시아의 주요 무대가 옮겨졌고, 이후 다시 블라디미르·수즈달로 이동한 후, 12세기 중반 등장한 모스크바가 14세기 중반부터 러시아 역사의 주요무대이자 러시아 정교의 구심점이 됐다. 1712년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모스크바로부터 수도 자리를 넘겨받았고 모스크바는 다시 1918년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킨 볼셰비키에 의해 수도 자리를 되찾았다.
수백년 넘게 긴장 관계를 형성해 온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는 탄생 배경, 도시의 외관, 지향하는 목표 등 많은 면에서 차별점을 드러낸다.
남성어미를 가진 남성명사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문학 작품 속에서도 신부를 찾아 헤매는 뭇 사내들의 도시로 묘사되지만 여성명사 모스크바는 신부감이 넘치는 여성의 도시로 그려지고 있다. 탄생 배경에서도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유럽으로 나가려는 출구를 마련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도시인 반면 모스크바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공간이다. 도시의 외관에서도 두 도시의 차이는 뚜렷하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광장을 중심으로 하는 열린 공간으로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대로를 중심으로 계획도시다운 바둑판식 구조가 형성되어 있지만 일정한 원칙이나 구체적인 계획 없이 형성된 모스크바는 그렇지 못하다. 지향하는 목표에 있어서도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라틴 문화적이었다면 모스크바는 오히려 비잔틴 문화에 가까웠다. 러시아 발레의 양대 산맥인 키로프(현 마린스키) 발레단과 볼쇼이 발레단이 각각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치열한 자존심 경쟁을 벌이는 것도 두 도시의 상이한 성격을 나타낸다.
이런 표면적인 비교를 넘어서면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형성된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라이벌 관계가 러시아가 지향하는 미래의 성격을 드러낸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러시아의 발전모델을 두고 치열한 경합을 보였던 19세기 러시아 지성사의 두 흐름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 논쟁'에서 모스크바는 슬라브주의의 정신적 고향,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서구주의의 버팀목으로 작용했다. 러시아의 발전 경로를 놓고 두 도시는 줄곧 맞서 왔고 현재에도 이 논의는 러시아가 동쪽을 지향하느냐 서쪽을 지향하느냐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1918년 7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처형된 로마노프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유해를 옮기는 문제를 둘러싸고 1998년 두 도시는 '러시아의 법통을 누가 잇느냐'는 첨예한 논란을 일으켰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결국 제정 러시아 마지막 황제의 유해안치에 성공했고 러시아 정교회가 니콜라이 2세를 시성, 로마노프 왕조를 복원시켰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소비에트 러시아로 단절된 러시아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승리를 자축했고 제정 러시아 수도라는 자존심을 회복했다.
중세의 모스크바, 근대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다시 현대의 모스크바로 이어진 러시아의 중심. 이제는 다음 세대의 중심이 어느 도시가 될 것이냐의 문제가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혹은 러시아 전체를 감싸고 있다. 이는 1472년 이반 3세가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녀 소피아와 결혼하고 동과 서 양 방향을 가리키는 쌍두 독수리를 러시아의 문장(紋章)으로 채택한 뒤 이어졌던 러시아의 해묵은 과제에 다름 아니다. 러시아는 유럽인가 아시아인가. 아니면 유럽의 외딴 섬일 뿐인가라는 정체성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영원한 라이벌,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긴장 관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황 성 우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 연구교수
● 블라디미르 리 러 외교아카데미 교수
러시아 국립외교아카데미 블라디미르 리(사진) 교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새로운 도시의 전형으로 설명했다. 유럽, 아시아, 혹은 러시아를 아우르는 열린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파리나 뉴욕처럼 여러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로 발전했다.
리 교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장점은 높은 문화적 수준을 갖춘 인적 자원들"이라고 말했다. 과거부터 인문학, 예술, 교육 중심지로 성장했기 때문에 현재에도 새로운 기술, 첨단 과학을 받아들이는 데 러시아 내 어느 도시보다 많은 발전을 이루고 있다.
이에 비해 모스크바는 심각하게 비대화한 도시다. 그는 "과거 사회주의 정권을 거치는 동안 사회 정치 등 전반적인 분야에서 완전히 봉쇄되고 정체된 상태에 접어든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일부 수도 기능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전하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됐다. 리 교수는 다만 "일부 학자들은 섣부른 수도 기능 이전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갖고 있는 문화, 역사의 수도로서의 의미가 퇴색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위상이 점차 높아지는 것에 맞춰 올해 300주년 행사의 의미도 더욱 커졌다. 리 교수는 "올해로 300살이 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상대적으로 젊은 도시"라며 "당초 이렇게 젊은 도시의 생일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야 하는지를 놓고 논란이 많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러시아는 많은 것을 얻었다"고 강조했다.
국립외교아카데미의 아시아태평양 연구센터 소장으로 한국 전문가이기도 한 그는 "힘든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뿌리와 정체성을 잘 보존해온 한국도 국제 사회에 스스로를 알리는 데 더욱 힘쓸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일개 도시 창건 행사에 세계 정상들을 초청하는 적극적인 기획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어두운 크렘린궁의 이미지 대신 문화적 이미지를 강조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아직까지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쉬운 부분. 리 교수는 "러시아는 앞선 기술력의 한국과 많은 일을 같이 하고 싶어한다"며 "한국도 이제 대륙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와의 관계 증진에 좀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한국과 러시아가 차관 반환 문제 정도에만 신경쓸 것이 아니라 넓은 시야를 갖고 협력 관계를 다져 나갔으면 좋겠다는 것이 리 교수의 바람이다.
/모스크바=진성훈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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