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세포는 잔인하다. 여자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앞가슴마저 가차없이 공격하고, 절제해 버리도록 한다. 미국 여자 8명 가운데 1명이 걸린다는 유방암. 서구여성에게 가장 위협적인 암으로 자리잡은 유방암이 국내에서도 여성암 1위로 올라섰다. 2001년 보건복지부 한국 암등록 보고서에 따르면 유방암이 전체 여성암 가운데 16.1%를 기록, 위암 대장암 자궁경부암을 제치고 가장 흔한 암이 됐다.한국 유방암학회 양정현 회장(삼성서울병원 유방내분비외과 교수)은 "안타깝게도 50대에 많이 발생하는 서구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30∼40대에 유방암 발생이 많다" 면서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유방암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고 말한다.
에스트로겐에 지속 노출되는 유방
유방암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대부분 암이 그렇듯 아직 발생 원인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의학자들이 첫 손가락에 꼽는 위험요인은 여성호르몬 에스트로겐이다.
서울대의대 외과 노동영 교수는 "에스트로겐은 여성성을 지켜주는 중요한 호르몬이지만, 유관세포의 증식― 분화를 촉진시켜, 오랫동안 에스트로겐에 노출될 경우 유방암 발병 확률이 높아진다"고 말한다. 독신 미혼여성이나 출산 경험이 없는 여성, 초경이 이르거나 폐경이 늦은 여성에게 유방암 발생 위험이 높은 것은 이 때문이다. 아기를 한번도 낳아보지 않은 여자는 자녀를 두 명이상 낳은 여자보다 유방암 위험이 2배나 높다. 여자의 일생동안 월경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발생 위험은 높아진다. 임신 기간엔 월경을 하지 않으므로 유방암 발생이 그만큼 낮아지는 것이다. 노교수는 "첫 아이를 일찍 가질수록 유방암 위험은 낮아진다"면서 "초산이 35세 이후로 늦은 경우 위험도가 2배나 증가한다"고 말했다.
인공낙태나 자연유산은 유방암 발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호르몬 대체요법도 유방암 증가시켜
2002년 미국 국립보건원의 여성호르몬 부작용에 대한 대규모 임상시험(WHI) 보고서에 따르면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혼합제는 유방암 발생 위험을 상당히 증가시키는 것으로 드러났다. 에스트로겐 단독 요법이 유방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아직 연구가 진행 중이라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유전적 요인
많은 연구들은 유방암 발생에 유전적 요인도 상당히 큰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서구의 경우 전체 유방암 가운데 5∼10%는 유전성(가족성) 유방암일 정도. 서울아산병원 외과 안세현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전성 유방암이 서구보다 훨씬 적은 편이지만, 유전성 유방암을 일으킨다고 알려진 BRCA 유전자 돌연변이가 있는 여자는 80세까지 약 80%에서 유방암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유방암 가족력이 있는 여자들은 규칙적인 스크리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직계 가족이나 형제 자매에서 유방암 환자가 2명 이상일 경우에는 반드시 BRCA 유전자 검사를 통해 유전자의 돌연변이 여부를 확인하고 전문의의 적절한 관리를 받아야 한다. 서울아산병원 안세현 교수팀은 내원한 가족성유방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0.8%에서 BRCA 돌연변이 유전자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또 p53유전자도 유방암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방암이 양쪽 가슴에 발생한 경우, 젊은 나이에 발생한 경우, 유방암과 난소암이 동시 발병한 경우 등은 특히 이들 유전자의 변형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가족성 유방암의 경우 50세 이전에 나타나는 확률이 높다.
입증되지 않은 또 다른 요인들
아직 확실히 결론이 나지 않은 주장이지만 모유를 먹인 여성은 유방암 발생률이 낮다고 추측되고 있다. 노교수는 "수유하지 않은 여성은 수유 여성에 비해 유방암 위험도가 1.8배나 높다. 특히 총 수유기간이 12개월 이상일 때 뚜렷한 유방암 보호효과를 나타낸다"고 말했다. 수유 기간동안 여자는 월경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에스트로겐에 노출되는 기간도 줄어든다고 할 수 있다 .
라이프스타일도 영향을 미친다. 과도한 음주는 유방암 발생에는 관련이 있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음주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위험은 더 높아진다. 그러나 적절한 음주는 오히려 심장병을 예방한다. 또 스웨덴의 한 보고서는 흡연은 유방암 발생위험을 높인다고 보고했다.
비만도 유방암 발생의 위험을 증가시킨다. 지방조직은 에스트로겐 수치를 올라가게 하며, 폐경 후 10㎏의 체중증가는 유방암 위험도를 80%나 증가시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부분 유방암 환자는 영양상태가 좋고 비만한 경우가 많아, 수술 후에도 '혹시 오진이 아니었나' 의심이 들 정도로 퉁퉁한 몸매를 갖는 경우가 많다.
규칙적 육체활동은 유방암 발생위험을 낮춘다. 노교수는 "비만지수가 25㎏/㎡ 이상이거나 체중이 64㎏이상인 폐경 여성은 유방암 위험도가 3∼5배나 높다"고 밝혔다. 최근 미국 암학회 보고서는 비만인 사람은 암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정상인에 비해 남자는 14%, 여자는 20% 높다고 밝혔다. 암에 걸리지 않으려면 과다한 당이나 지방 섭취는 피해야 한다.
폐경기 여성에게 당뇨병이 있을 경우에도 유방암 발생 위험이 높아진다. 혈액 속 인슐린 수치가 올라가면서 당뇨병을 촉진한다. 한때 피임약도 유방암 위험을 높이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엔 큰 상관관계는 없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외에도 잦은 밤샘 근무, 전자파 노출, 카페인 섭취 등도 유방암 발생 위험요인으로 거론되고 있으나 과학적 증거는 없다.
진단기술의 발달
유방암 발생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진단기술의 발달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유방 정기 검진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여자들에게 유방촬영술이 널리 실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시 지역 암등록 사업단(단장 안윤옥 서울대의대교수)이 93년부터 97년까지 암환자 9만3,000여명을 추적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암 발생률이 가장 높은 곳은 강남구였다. 유방암은 10만명당 26.4명으로 금천구(14.0명)에 비해 거의 두배. 하지만 사망률은 상대적으로 낮아, 정기검진으로 환자 수도 덩달아 증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방암 진단에는 의사의 촉진과 맘모그램이 가장 일반적이며 유방초음파, MRI 등 검사도 이루어진다.
김미혜 유클리닉 원장은 "양성 종양 자체가 유방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유두종증이나 비정형 세포증식증 같은 양성 멍울은 유방암에 걸릴 확률을 높이므로, 미리 예방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말했다.
/yjsong@hk.co.kr
■ 유방암 이기려면…
유방암 환자는 암에 걸렸다는 충격 외에 유방을 절제했다는 상실감에 시달린다. 환자가 느끼는 고통에 초연한 척 하지만 내심 나도 고민할 때가 많다.
20대 중반 여성에게 유방암이라고 쩔쩔 매며 설명하다, 때로는 환자로부터 내가 위로받을 때도 있다. 한 쪽 유방을 절제한 여자환자가 '뭐 어때요?'하고 씩씩하게 대응할 때면 가슴이 찡할 때가 많다. 많은 환자들은 당황하여 물은 말 또 묻고, 확인하고, 심지어는 스토커처럼 따라 다니며 '애들이 어린데… 나 이러다 죽게 되는 것은 아니냐'등등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기도 한다.
나는 환자들을 공개석상에서 나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많은 정성을 들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내가 만든 흉터를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한다. 어떻게 충격과 고통을 이겨 나가는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등. 수천명의 유방암 환자를 수술하면서, 장기 생존자들의 공통된 특징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점을 알게 됐다. 밝은 미소에 자신에 찬 음성을 대하면 건강은 바로 저런 데서 나오는구나라고 느끼게 된다.
물론 두려움을 감추고 있는 수도 있겠지만 내면적으로 병 자체를 승화시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놀랍게도 어떤 이는 자기는 유방암에 걸린 것을 감사히 여긴다고 말한다. 무서운 병을 겪게 되면서,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인생의 소중함과 무게를 느끼게 됐으며 이후 순간순간을 소홀히 보내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고 했다.
물론 모두가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수에서 재발을 경험하게 되고 또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이런 때 의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제한된다. 하지만 이럴수록 환자나 보호자는 의사에게 구체적 한계를 물어보고 본인이 싸워야 할 부분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것이 좋다. 설사 재발됐다 해도, 곧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의지에 찬 마음가짐으로 절제된 생활을 한다면, 병마는 결코 환자를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노동영 서울대의대 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