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을 아름답게 만들기에 앞장서야 할 방송인들이 오히려 우리 말을 귀에 거슬리게 발음하고 있어 시정을 촉구한다. 김상준 아나운서가 얼마 전 성우협회 세미나에서 "요즘 써놓은 대로 발음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우려한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경음을 연음으로 발음하는 현상이다. 현재 방송인들이 발음하고 있는 대로 단어들을 적어보면 '불법'(不法), '체증'(滯症), '효과'(效果), '버쓰'(bus), '달라'(dollar), '자장면'이 있다. 이들 단어는 예전에는 '불뻡' '체쯩' '효꽈' '뻐쓰' '딸라' '짜장면'으로 발음했다. 이들 경음 단어들을 연음으로 발음하게된 시기는 1980년대 전두환 정권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어정책을 주도하던 국립국어연구원은 된소리가 많아지면 세상이 각박해지고 심성이 사나워진다는 논리로 가급적 연음으로 발음할 것을 권했다. 일설에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된소리에 서툴렀던 것과도 관련 있다고 한다.
이 같은 분위기에 따라 1988년 한글맞춤법이 개정되면서 '표준말은 현재 서울의 중류사회에서 쓰는 말로써 한다'가 삭제되고 '표준어는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한다'가 강조됐다. 이때부터 우리 말 혼란이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글자대로 발음이 안 되는 단어는 아예 글자를 바꾸는 일까지 벌어졌다. 예를 들어 몇년 몇월 몇일의 어원은 '몇'인데 몇년, 몇월은 그대로 두고 '몇일'만 '며칠'로 바뀌었다. 닿소리 이어받기 어법을 무시하고 '했읍니다'를 '했습니다'로 바꾸었다. 그렇다면 왜 '했으니까'는 그대로 두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되자 한글로는 같은 글자이지만 한문으로는 뜻이 다른 단어들을 구분하지 못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고까'(高價), '고가'(古家)가 이제는 동일하게 '고가'로 발음되고 있다.
도대체 경음을 발음하면 심성이 나빠진다는 논리의 근거는 무엇인가. 방송인들이라도 나서서 잘못된 관습을 시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부채질하고 있다. 요즘 방송을 듣노라면 표준어의 정의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할 것 같다. "표준어란 국립국어연구원이 주장하는 것을 방송인들이 쓰는 언어를 원칙으로 하고 그 규범으로는 경상도의 중류 사회에서 교양 있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와 특히 외국인이 쓰는 우리말을 표준 모델로 삼아야 한다".
국립국어연구원은 신음하고 있는 우리 말 현실을 직시하기 바란다.
이 종 구 KBS 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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