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김흥수'로 불린 나도 요즘 힘이 빠졌다. 여태껏 '타고난 정력가' '폭군 화가' '고함쟁이 영감' 등의 소리를 들었지만 세월에는 별 뾰족한 수가 없나 보다. 1999년 누드 드로잉전을 할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지난해 허리 염증 제거수술을 두 차례 받은 후 급속히 기력이 떨어졌다. 수술할 때마다 전신마취를 해서 후유증이 심한 것 같다. 허리가 불편하니 걷는 일도 힘들어서 최근에는 누워있는 게 일이다. 80㎏에 육박하던 체중도 70㎏대로 줄었다. 얼마 전에는 화장실에 갔다가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하고 기어서 나왔다. 소같이 탄탄했던 내 몸이 어느 새 이렇게 됐는지.사실 나는 건강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타고난 건강체질인 데다 젊은 시절 야구 럭비 권투 곤봉 기합술 등을 섭렵하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해둔 게 나이 들어 큰 효력을 보았다. 젊을 때 운동에 투자한 시간이 '이자'를 낳았다고나 할까. 70대까지도 누구와 팔씨름을 해도 지지 않았고, 한 팔에 아내 수(부인 장수현씨)를 매달고도 끄떡 없었다. 고희 넘어 결혼해서도 날밤을 새워 창작하고, 영재미술교실을 열어 어린이들을 가르치면서 나이를 잊었다.
음식도 아프기 전까지는 뭐든지 잘 먹었다. 술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아 배우지 않았고 도쿄(東京)미술학교 시절부터 무의식적으로 피워 온 담배 역시 서른 살이 넘어서는 입에 대지 않았다.
40여년 가까이 이른 아침마다 생수를 마시고 녹차를 즐긴 것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싱싱한 아내가 20년 동안 밤낮으로 옆에서 손발이 돼 주고 사랑해 주었으니 어찌 힘이 솟지 않을까.
이렇게 노인네 답지 않은 스태미너로 주변의 부러움을 샀던 내가 맥을 못 추게 된 것은 나이도 나이지만 지난해 미술관을 지으면서 있는 대로 속을 끓였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설치를 위해 옥탑을 만들었더니 주민들이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민원을 제기했다. 주민들이 동네 어귀에 '미술관이 웬말이냐'는 플래카드를 내걸었을 때는 눈앞이 캄캄했다. 또 미술관 진흥기금을 대출 받으려고 했는데 그것마저 무산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1년 만에 옥탑을 헐어내고, 부족한 돈은 작품 6점을 은행과 경매회사에 담보잡히고 대출을 받아 지난해 12월 어렵게 개관했다.
미술관은 지하 2층, 지상 2층으로 지었다. 지하 2층에 내 작품을 전시할 겸 보관해 두고, 지하 1층과 지상 1층은 모두 영재미술교실로 쓰며 어린이들의 그림을 전시해두고 있다. 어렵게 만든 미술관이라 그런지 구석구석 애착이 가지 않는 곳이 없다. 그래서 미술관 옆에 구해놓은 집 대신에 미술관 2층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 두고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 며칠 후에는 또 수가 병원에 입원을 하게 돼 걱정이 태산이다. '물혹' 제거 수술을 받기 위해 2주일 정도 입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옆에 다른 사람이 있지만 어찌 아내에 비하랴. 화장실에서 쓰러졌을 때도 수가 없을 때였다. 그때 화장실에서 기어 나오는 동안 내 머리 속에는 지난 80여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미술공부를 말리는 부모님과 다툰 후 죽으려고 강물로 달려가던 일, 도쿄미술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해 우쭐했던 일, 열아홉살 때 처음으로 누드화를 그리기 위해 동갑내기 처녀의 옷을 벗기고 캔버스 앞에 앉았을 때의 황홀함, 파리 몽마르트에서 내 작품이 불티나게 팔렸을 때의 감격, 대학 정년퇴임을 앞두고 만난 앳된 수와 과천 서울대공원에 놀러 갔던 일, 한국화가 최초로 러시아 에르미타쥬 미술관과 푸슈킨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갖기 위해 오가던 일 등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인생이 다 이런 것인가. "하긴 내 또래 영감들이 대부분 떠났는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직 내 마음은 팔팔하다. 몸은 좀 불편하지만 머리는 더욱 또렷해진다. 시간이 나는 김에 옛날 일이나 한번 되돌아 보고싶다. 그러다 보면 붓 쥘 힘도 생기겠지. 80여년간 누구보다 화려한 색으로 채웠다고 자부하는 내 인생의 캔버스, 그 안에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하나씩 들춰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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