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 너스봄 등 지음·오인영 옮김 삼인 발행·9,500원컴컴한 영화관에서 기다리던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꼭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듣고, 대한뉴스를 봐야 했던 때가 엊그제 같다. 1980년대까지도 한국은 어느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애국의 열정이 흘러 넘친 나라였다. 맹목적 애국주의가 다소 낡게 여겨진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아마도 시장 개방이나 외국인 노동자 증가, 잦아진 해외 여행 등이 요인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배타적 애국주의와 무비판적 세계화 사이에서 사회를 끌어갈 새로운 도덕 이념을 모색해 할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 책은 매우 좋은 참고서가 될 만하다. 미국 하버드대가 발행하는 격월간 논문집 '보스턴 리뷰' 1994년 10월 호에 실린 마사 너스봄 시카고대 법학·윤리학 교수의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라는 글과 그에 응답한 16편의 글을 편집한 것이다.
너스봄의 글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논자들의 면면이 화려한 것도 구미를 당긴다. 성역할 관련 연구로 1990년대 인기를 누린 주디스 버틀러 UC버클리대 교수, 언어철학자로 유명한 힐러리 퍼트남 하버드대 교수, 9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마티아 센 하버드대 교수, 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한 이매뉴얼 월러스틴 페르낭 브로델 연구소장, 공동체 이론으로 평가 받고 있는 마이클 왈저 프린스턴대 교수 등이다.
채 20쪽을 넘지 않는 너스봄 글의 요지는 애국적 자부심을 강조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위험하며, 실천적 사고의 제1 원칙은 인류 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가치를 동등하게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애국주의와 자민족 중심주의적 배타주의는 별로 다르지 않으며 국가주의 감정의 옹호는 정의와 공정이라는 본질적 가치를 겉만 번드르르한 우상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대신 세계시민주의에는 일국에 한정된 인간 존중의 가치가 전세계 차원의 가치로 확대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실려 있다고 지적한다.
16명의 논자들은 크게 세부류로 나뉜다. 세계시민주의가 자칫 문화적 획일화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계하면서도 대의에는 찬성하는 비판적 지지파가 있는가 하면, 세계시민주의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 낙관주의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는 부류가 있다. 또 월러스틴이나 왈저, 버틀러 등은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며 개념의 틀에 집착하지 말 것을 주장한다.
너스봄의 글은 매몰차게 말하면 순진하기 짝이 없는 '희망사항'의 나열이거나, 너그럽게 보아도 자국 배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경계해야 할 몇 가지를 '세계시민주의'라는 옛 개념을 끌어대 포장한 정도로 여겨진다. 세계시민주의 옹호론자들의 논지에서는 원론적인 의미의 정의 개념을 실현하는 것과 세계시민주의자가 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너스봄의 글보다는 세계 시민이라는 개념이 매우 모호하다는 월러스틴의 지적을 더 새길 만하다. 그에 따르면 '올바른 대응은 현존하는 불평등을 타파하고 좀더 민주적이고 평등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세력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교육적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세계 시민이라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한 세계에 있다는 것이며 공평무사하고 세계적으로 되는 것과 자신의 협소한 이익을 옹호하는 것은 대립하는 게 아니라 복잡한 방식으로 결합돼 있다는 점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글이 나올 당시는 냉전이 끝나고 유일 초강대국으로 호기롭게 새 출발한 미국(당시는 빌 클린턴 대통령) 내 상황을 두고 식자들 사이에 이른바 '미국식 애국주의'가 화두가 된 때다. 하지만 조지 W 부시 대통령 정부가 '일방주의 외교 정책'으로 지탄 받고, 9·11 테러 이후 미 국민 가운데서도 지나친 '애국주의' 경계론이 나오는 지금 이 논쟁이 더욱 가치를 발하는지도 모르겠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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