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걷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독일거리는 망각과 기억의 의지가 맞부딪히는 싸움터라는. 거리 곳곳에 잊고 싶어하는 과거와 잊혀지지 않으려는 역사의 기억이 투쟁하고 있다. 파란 많은 독일 역사의 한복판에 위치해 온 베를린의 거리는 이를 확연히 증명한다.분단된 독일의 반쪽을 지배하던 사회주의 동독 정권은 독일 민주주의 공화국(DDR)의 수도 베를린이 사회주의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살아있는 이념의 공간이기를 원했다. 그들은 베를린이 시민들은 물론 관광객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역사를 환기시키고 동독 정권의 이념적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장소가 되길 바랐다. 이를 위해 동독은 거리마다 사회주의 역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이름을 붙였다. 칼 마르크스로(路), 마르크스 엥겔스 광장, 레닌 광장, 디미트로프 거리, 호치민가(街) ….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더불어 베를린은 다시 통일된 독일 연방 공화국(BRD)의 수도가 되었다. 새 수도 베를린의 주인이 된 이들은 레닌 광장에 서 있던 거대한 레닌 동상과 함께 동 베를린 거리에 붙어있던 낡은 사회주의식 이름을 철거하는 작업을 벌였다. 레닌 광장은 연합국 광장으로, 디미트로프 거리는 단지거 거리로, 호치민가는 인디라 간디 가로 개명되었다. 통일된 베를린의 새 주인들은 그들의 거리가 붕괴한 사회주의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이름들로 불리길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호치민 등의 이름을 자신의 거리에서 삭제함으로써 그들은 사회주의 동독이 그 이름들을 통해 기억하고자 했던 역사의 한 부분을 잊고 싶어했던 것이다.
사회주의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원하는 독일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는 역사의 한 부분에 붙들려 있다. 홀로코스트로 상징되는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역사가 그것이다. 잊어버리고 싶은 어두운 과거는 도시 곳곳에 세워진 나치 희생자 추모탑과 기념비, 나치 희생자 이름을 딴 거리 등을 통해 독일인들에게 늘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나치에 의해 지어진 벙커와 건물, 거리와 가로등, 폭격으로 파괴된 교회를 그대로 남겨놓음으로써 도시 베를린은 그곳을 지나다니는 모든 독일인들에게 유쾌하지 못한 역사의 한 부분을 고통스럽게 기억하도록 만든다.
얼마 전 베를린에서는 철거되어 땅 속에 묻힌 레닌 동상이 파헤쳐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또 동 베를린에 남아있는 전몰 소련군 위령비가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기도 했다. 잊으려는 혹은 잊지 않으려는 역사를 둘러싼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김 남 시 독일 훔볼트대 문화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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