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환(53) 프로농구 LG 세이커스 감독의 이름 앞에는 늘 두 가지 수식어가 붙는다. '승부사'와 '뚝심'이다. 30년 넘는 지도자 생활 중 무수한 우승을 일궈냈고 학연이 유난한 농구계에서 동대문상고 무명 선수 출신으로 초등학교부터 시작해 여중, 여고, 여자실업, 남자 대학을 거쳐 프로 감독에까지 이른 인생 역정 탓이다. 맨 손으로 정상에 선 그에게는 지금도 "이겼다"는 말처럼 신나고 소중한 게 없고, "졌다"는 것처럼 화나고 쓰린 게 없다.감독에게는 승리의 기쁨도 패배의 쓰라림도 선수들에게서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김 감독의 농구 인생은 수많은 선수들과의 인연으로 촘촘하게 짜여져 있다. 김 감독은 그 중 한 명을 끄집어 내는 것을 무척 힘들어 했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그는 조문주(39·성신여대 감독)와의 인연을 풀어 놓았다.
돌아보면 국민은행 감독 시절 조문주와 해 낸 1990년 2월 '89 농구대잔치' 우승만큼 감격스러운 일도 없을 듯 싶다. 학교 감독만 하다 처음으로 실업팀 지휘봉을 잡고 10개월 만에 일궈낸 첫 우승이었고 4연패를 노리던 당시 최강 삼성생명을 꺾어 김태환이란 이름을 농구계에 당당하게 알린 계기였기 때문이다.
김 감독이 조문주를 처음 본 것은 80년대 초반 선일여고 감독 시절. "당시 조문주는 성덕여상에서 뛰고 있었는데, 신장과 체력이 좋아 가능성이 보이더군요." 그리고 86년 국민은행 코치로 실업무대에 첫 발을 내밀면서 같은 팀의 코치와 선수로 만났다. 반가웠다. 그 사이 조문주는 국가 대표 센터에 선발될 정도로 부쩍 성장해 있었다.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간 욕심쟁이가 아니었지요. 후배 센터와 경쟁을 시키면 한 골도 못 넣게 했으니까요. 승부에 대한 집념에서 나랑 통하는 선수였습니다."
감독으로 올라갔을 때 먼저 믿음이 간 것도 조문주였다. 김 감독은 20대 여자 선수들에게 산악 훈련 등을 "반 죽을 때까지" 시켰고 경기에 진 날은 잠도 재우지 않고 비디오를 보면서 수도 없이 같은 상황을 반복케 했다. 울면서 마지못해 따라오는 선수도 있었지만 조문주는 살인적인 지도를 치를 떨면서도 견뎌내고 그를 통해 정신을 단련할 줄 알았다. 영리했다. 단점이었던 몸싸움 기피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졌다. 삼성생명과의 시합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무릎 인대가 늘어난 조문주는 적외선 치료기를 살이 탈 정도로 쏘이고 말없이 코트에 나서 기어코 김 감독에게 우승컵을 안겼다.
코트에서 호랑이인 김 감독이지만 코트 밖에서는 털털한 아저씨다. 오죽하면 별명이 '쌀집 아저씨'다. 경기 외적인 것은 무리하게 통제하지 않는다. 유난히 신앙이 깊은 조문주가 선수들 유니폼에 직접 십자가를 수놓아 TV 중계 후 불교 신자들이 예금을 빼간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모른 척 했다. 감독을 맡자마자 "나이도 있고 결혼도 해야 한다"며 은퇴 의사를 밝힌 조문주를 "팀 사정을 생각해 1년만 희생해 달라"며 세 시즌이나 붙잡을 수 있었던 것도 코트 밖에서 정이 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문주가 1500 리바운드라는 대기록을 달성한 91 농구대잔치가 끝나고는 더 잡을 수 없었다. 조문주가 은퇴하는 날, 김 감독은 "딸을 시집 보내는 아버지 같은 마음이었다"고 기억한다.
김 감독은 요즘도 가끔 조문주를 만난다. 쓸만한 대학 선수를 찾으러 나서는 대학 시합장에서다. 선수들을 좀 심하게 다루는 것 아니냐고 한마디 하면 "다 선생님에게 배워서 그렇다"고 받아 넘긴다고 한다. 감독으로서도 어지간할까 싶지만 노파심은 어쩔 수 없다. 8월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첫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니 더 그렇다. "강팀과 붙더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총 동원해 꿈을 펼쳐 보이길 바란다"는 김 감독의 당부는 여전히 시집 간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김지영 기자 koshaq@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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