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께서는 뉘 집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며 누구의 종풍을 이은 것입니까?""운봉스님의 일구(一句)를 이어 받았나니, 영겁토록 쓰고도 다하지 않느니라."
"그 밖의 별다른 한마디가 있습니까?"
"허리춤에 십만관의 돈을 두둑이 차고 하늘 땅 저 밖을 마음대로 노닌다네." "스님의 일구는 어떠합니까?"
"하나를 들먹이면 일곱을 얻느니라."
"어떤 것이 최초의 한 마디(最初句·최초구) 입니까?"
"석가와 미륵이 도탄에 빠졌느니라."
"어떤 것이 최후의 한 마디(最後句·최후구) 입니까?"
"번개불 속에 곤두박질 치느니라."
"어떤 것이 여래선 입니까."
"눈 밝은 납자가 깊은 우물에 빠짐이니라."
"어떤 것이 향상(向上)의 한 마디입니까?"
"부처님과 조사가 불속의 하늘로 물러갔느니라."
"어떤 것이 향하(向下)의 한 마디입니까?"
"돌사람이 무쇠소를 잡아타고 벽옥의 세계로 날았느니라."
"어떤 것이 몸을 바꾸는 한 마디입니까?"
"머리 셋에 팔을 여섯 가진 놈이 삼키고 뱉음을 자재로 하느니라."
향곡과 전법(傳法)제자 진제(眞際·조계종 원로위원)의 법거량이다. 사제간의 법거량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더구나 법을 전수해준 전법제자와의 그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스승에겐 제자의 근기(根機)와 법기(法器)를 헤아릴 수 있고 제자에겐 스승의 내적 자증(自證)의 영토를 엿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제자의 물음은 외견상 지극히 평범해 보인다. 그러나 그 평범 속에 비수가 감춰져 있다. 구도와 수행의 과정, 불법의 진리가 선가의 고유언어로 압축돼 있다. 예컨대 일구, 최후구는 불법의 진리를 일컫는다. 향상구는 자기, 향하구는 남을 깨우치고 이롭게 하는 가르침이다. 스승의 대답은 견성(見性)의 문턱에라도 가보지 못한 사람에겐 난수표나 다름없다. 하지만 향곡의 대답은 차별과 분별을 여읜 절대무의 경지로 정교하게 무장하고 있다.
불심이 돈독한 집안에서 성장한 향곡혜림(香谷蕙林·1912∼1978)은 17세 때 이미 사문의 길로 들어선 둘째형에게 가사와 장삼을 전해주려 양산 내원사를 찾았다가 발심을 한다. 향곡의 확연대오(廓然大悟)는 광복 2년 뒤 문경 봉암사에서 이뤄진다. 훗날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청담(靑潭) 성철(性徹) 등 20여명의 수좌와 봉암사 결사를 하고 탁마하던 그 해 가을 이었다.
문득 두 손을 보고 전체가 드러났네(忽見兩手全體活·홀견양수전체활)
삼세의 부처와 조사도 눈병에 헛꽃이로다(三世佛祖眼中花·삼세불조안중화)
온갖 경전과 법문이란 도시 어떤 물건인가(千經萬話是何物·천경만화시하물)
이를 좇아 부처와 조사가 모두 상신실명했구나(從此佛祖總喪身·종차불조총상신)
봉암사의 한 번 웃음 천고의 기쁨이요(鳳岩一笑千古喜·봉암일소천고희)
희양산 구비구비 만겁에 한가롭네(曦陽數曲萬劫閑·희양수곡만겁한)
내년에도 둥근 달은 또 다시 있겠지(來年更有一輪月·내년갱유일륜월)
금풍이 부는 곳에 학의 울음 새롭구나(金風吹處鶴 新·금풍취처학려신)
생사의 바다를 건넌 무위(無爲)의 세계를 매우 절제 있게 토해낸 오도송이다. 걸림이 없는 반야의 마음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둘째 연의 안중화는 안화(眼華) 또는 공화(空華)를 말한다. 눈병에 걸려 허공에 꽃이 무수히 날리는 것처럼 보이는 증세다. 의학용어로는 날피리증이다. 안중화는 부처와 조사에 의지하다가는 헛물만 켜다가 생을 마치게 된다는 뜻이다. 조주는 한 티끌이라도 유무에 걸려 있다면 신명을 잃는다고 했다. 분별과 집착을 경계한 것이다. 일체의 아집도 법집도 떠나보낸, 투명한 지혜만이 반짝이는 깨달음의 노래다. 향곡은 이제 하늘 훤히 밝아오는 새벽을 맞이한 것이다.
"너희들 몸뚱이 속에는 하나의 무위진인이 있다. 항상 그대들의 면전에 출입을 하고 있다. 부처를 절대자로 생각하지 말아라. 부처란 관념을 못 버리고 있으면 그 부처는 너희들을 얽매는 쇠사슬에 불과하다." 지금 설법을 듣고 있는 대중이 바로 부처며 조사다. 향곡불교의 뼈대를 이루는 무의(無依)·무구(無求)의 사상이다. 부처를 찾으면 부처를 잃고 도를 구하면 도를 잃는다.
무의진인(無依眞人) 무의도인(無依道人) 무위진인(無位眞人)- 임제종을 개창한 중국 당나라의 대선사 임제(臨濟)는 지혜로워진 사람을 이렇게 불렀다. 향곡이나 임제 모두 인간의 절대 무조건적인 존엄성을 일깨우기 위해 그런 어휘를 사용한 것이다.
"바느질은 어떻게 하는 거냐?" 한창 선풍을 드날리던 선사 고봉(高峯)이 누더기를 깁고 있던 향곡에게 다가와 물었다. 향곡이 행각을 하던 젊은 시절이었다. 향곡은 바늘을 빼서 냅다 고봉의 다리를 찔렀다. "아야, 아야!" 고봉이 비명을 질렀다. 비명이 그치기 무섭게 다시 한번 고봉의 다리를 찔렀다. "그 녀석 바느질을 잘 하는구나." 고봉은 껄 껄 웃으며 향곡의 근기를 칭찬했다. 향곡의 행위는 부처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자신의 본래면목임을 시사한다.
"약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금병에서 나오며 검은 난리를 평정하기 위해 보배칼집에서 나온다. 누구든 찾아오면 나의 안목대로 말해줄 것이니, 전을 펴는 것도 그 물건이 팔릴만한 곳에 가서 펴야 하는 것이다." 향곡은 절이나 종단의 직책을 맡기보다 선방수좌들과 호흡하기를 즐겨 했다. 아낌없이 법음을 베풀었다.
"어떤 사람이 단식을 하고 나서 '명리도 여자도 재산도 다 배가 부르니까 탐이 나는 것이지 배가 고프니 아무 생각도 없더라'고 말을 했다. 그와 같이 공부도 다른 것 일체를 생각하지 말고 하면 안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예전 스님들은 하루 해가 지나가면 다리를 뻗고 울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공부하려고 하는 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안타까움이 절절하게 묻어나오는 향곡의 할(喝)이다. 향곡과 동시대를 산 선사들의 눈에는 한국선의 미래가 아주 불투명하게 보였다. 이민족의 오랜 억압으로 종풍은 흐려질 대로 흐려진 데다 정화운동의 후유증 등이 겹쳐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향곡은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향곡의 삶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남보다 빨리, 그리고 치열하게 삶의 불꽃을 태운 향곡은 78년 12월18일 부산 해운정사에서 세수 66, 법랍 49세로 열반에 들었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 향곡 연보
1912.1.8. 경북 영일 출생, 속성 경주 김(金)씨
1929 양산 내원사에서 출가, 법호 향곡, 법명 혜림
1944.8 내원사에서 개오(開悟)
1947 봉암사에서 대오(大悟)
1978.12.18. 부산 해운정사에서 세수 66, 법랍 49세로 입적
"죽은 사람을 죽이고 또 죽여야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보고(殺盡死人方見活人·살진사인방견활인) 죽은 사람을 살리고 또 살려야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본다(活盡 死人方見死人·활진사인방견사인 )는 법문이 있는데 무슨 뜻인가?"
성철이 어느날 도반인 향곡과 청담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시 셋 모두의 마음에는 반야의 꽃봉오리가 맺힌 상태였으나 봉오리를 꽃으로 피우기 위해 문경 봉암사에서 자신과 처절한 싸움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 질문은 성철 자신 뿐 아니라 향곡에게도 의단(疑團)의 먹구름이 되어 몸과 마음을 지배했다. 둘은 서로 밀고 끌어주면서 먹구름을 걷어내고 내면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힌다. 한국선의 대종사로서 큰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성철이 던진 의문은 '대사저인(大死底人·크게 죽은 사람)의 화두를 떠올린다. 이 화두는 임제종의 조주(趙州)와 조동종의 투자대동(投子大同)의 문답에서 태어났다. 선문에는 '먼저 크게 죽은 뒤에야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죽음은 생명의 멈춤이 아니다. 일체 번뇌망상을 말끔히 씻어내고 상대적 관념을 모두 비워버린 절대무의 경지를 일컫는다. '살진사인방견활인 활진사인방견사인'의 법문 역시 그렇게 해석을 할 수 있다. 아마도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이 마음에 새긴 사즉필생(死卽必生) 생즉필사(生卽必死)의 정신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동갑내기인 향곡과 성철은 서로에게 둘 도 없는 도반이었다. 특히 성철의 딸 수경의 출가배경에는 향곡의 영향도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같다. 수경은 성철이 출가 전에 낳은 딸로 지금은 비구니계의 원로인 불필(不必). 한국전쟁 초기 향곡과 성철은 묘관음사(부산 월래)에 머물고 있었다. 여학생 수경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친을 찾아왔다. 그러나 수경이 꿈에 그리던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은 "가라, 가"라는 야속한 말 뿐이었다. 분노와 눈물을 삼키고 발길을 돌리던 수경을 무서운 얼굴의 향곡이 부드러운 미소로 붙잡았다. "그날 호통치시던 아버지 대신 저를 '내 딸'이라며 달래주었던 향곡스님의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그날이 불교와의 첫 만남이기도 했다." 불필의 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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