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을 통한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후진국의 나락으로 다시 떨어지느냐.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국가역량을 총결집 해도 부족한 상황이지만 현실은 정치권의 대립과 노조의 줄파업 등 분열상만 노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전문경영인 모임인 한국CEO포럼은 20일 이례적으로 성명서를 발표, "노·사·정 3자 모두 자기 반성을 거쳐 스스로의 역할에 충실해 작금의 위기를 극복하자"고 호소했다. 27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한국CEO포럼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윤병철 우리금융그룹 회장과 강석진 CEO컨설팅그룹 회장의 대담을 통해 현 사태를 바라보는 기업인의 솔직한 심정과 해결방안에 대해 들어보았다. /편집자주진행=배정근 경제부장
윤병철 회장=20일은 한국CEO포럼 창립 2주년이었습니다. 경제가 위기에 놓여 있는 판에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견해를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죠. 전자우편을 통해 회원들끼리 의견을 모아 성명서를 마련했습니다.
강석진 회장=지금은 향후 50년의 국운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시점입니다. 정부가 동북아 허브를 구축한다고 하지만, 기업인들은 앞으로 3년 안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면 오히려 한국이 후진국으로 밀려날 것이라는 위기를 절박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윤 회장=1만 달러를 돌파한 것이 8년 전인데 한국 경제는 아직도 원점을 맴돌고 있습니다. 참여정부의 등장에 기대를 많이 걸었지만, 서로 남의 탓만 하면서 사회 불안이 커지고 있습니다. 성명서를 낸 취지도 바로 그런 겁니다. 기업인, 근로자, 정부가 스스로를 반성하고 자기의 역할에 충실해 미래로 나가자는 거죠.
강 회장=계층간, 세대간, 이해집단 간 대립만 하다가는 최악의 경우 중남미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참여정부라는 명칭에 걸맞게 특정 계층, 특정 세대만 참여하지 말고, 국민 모두가 한 방향으로 가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소득 2만 달러의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노사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윤 회장=어쩌면 작금의 상황이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통과의례일 수도 있습니다. 또 노사대립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사회 분위기를 타고 적극적으로 부각된 것이겠지요. 하지만 '너는 과거에 잘못했으니 우리 요구대로 하라'고 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이룬 성과도 지키기 어렵습니다. 서로가 반성해야 합니다.
강 회장=가장 심각한 문제는 대화단절 입니다. 우선 노사가 대화를 해야 하고, 다음은 정부나 정치권에서 노사문제에 개입하지 말아야 합니다. 노사문제는 노사가 머리를 맞대면 시간이 조금 걸려도 결국은 해결됩니다. 경제논리로 접근해야 할 노사문제가 지금은 너무 정치적인 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윤 회장=이제 노조도 상당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부는 노사간 대화가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는데 만족해야 합니다. '근로자는 약자다. 무언가 정부가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 측면이 있습니다. 성명서에서 '정부가 할 일은 하되,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안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아시아 각국이 치열한 허브 경쟁에 접어든 가운데 참여정부도 동북아 허브를 주창하고 나섰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강 회장=동북아 중심국가 건설은 꿈이 아닙니다. 지정학적 여건도 그렇고, 우리 국민은 남다른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허브가 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원만한 노사 관계 입니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선 노동자들이 연일 뉴스를 타고 있는데, 그 장면을 본 외국인 투자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정부는 노사문제에 직접 개입하지 말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도록 지켜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어느 편 손을 들어주면 일이 더 꼬일 뿐입니다. 노사정위원회가 노사간 중재보다는 의결기능에 치중하는 바람에 부작용이 더 많습니다.
윤 회장=행정의 인내력이 중요합니다. 정부가 민간 부문에 사사건건 개입을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국민들은 정부가 개입을 하지 않으면 무책임하다고 비판하고, 거꾸로 개입하면 간섭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정부로서도 고민이 있죠. 하지만 정부 스스로 균형을 찾고 법과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한국 경제가 2만 달러 시대로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한번 해보자는 의지가 중요한 거죠.
강 회장=우리에게는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와 동북아 경제중심 건설이라는 두개의 커다란 비전이 있습니다. 문제는 비전을 내세우면서 행동은 따라가지 않는 거죠. 요즘 정부 안에서 따로 가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정부나 노동계에서 경제인들을 대립 상대로만 바라보는 것도 '비전 따로, 행동 따로'식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2만 달러 시대와 동북아 경제중심 건설이라는 비전 실현에 앞장 서야 할 경제인들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면 도대체 누가 앞장설 수 있겠습니까.
윤 회장=과거 성장일변도의 정책 때문에 정당하지 못한 부의 축적이나 왜곡된 부의 세습 등 부작용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성명서에도 밝혔지만, 경제인들 스스로 지난날의 잘못은 반성하고 개혁할 것은 개혁해야 합니다. 하지만 기업이 없으면 노조도 없습니다. 글로벌 경쟁의 전사인 경제인들을 과거의 잘못만 문제 삼아 옥죄여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강 회장=과거에는 윤리경영을 하면 손해라는 생각도 했지만, 이제는 우리 기업들도 투명경영, 윤리경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을 계기로 국내 기업들의 그런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질 것입니다.
윤 회장=SK글로벌 사건 하나만으로 경제계 전체를 매도하기보다는 국내 기업들이 최근 추구하고 있는 큰 흐름을 봐야 합니다. 시장의 감시체계 때문에 이제 투명경영, 윤리경영을 하지 않는 기업들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투명경영, 윤리경영도 선언적 의미보다 경영 시스템으로 정착되고 있습니다.
강 회장=경제집중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많지만, 경제집중은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다만 공정거래, 투명한 경영을 지켜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지요. 노키아의 매출은 핀란드 GDP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경제집중을 더해야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적인 기업들이 나올 수 있고 경제성장이 가능합니다. 사실 삼성 같은 기업 하나가 있으면, 수천개 중소기업을 먹여 살리는데, 이런 기업이 다섯 개만 있으면 소득 2만 달러 시대는 순식간에 이룰 수 있습니다.
윤 회장=기업 규제는 있을 수 있지만, 우리의 경우 '이런 조건이 충족해야 된다'는 포지티브 시스템이 문제입니다. '이런 조건 외에는 다 할 수 있다'는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기업 규제가 바뀌어야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될 겁니다.
강 회장=하루빨리 계층간, 세대간, 이해집단간 대립 양상에서 벗어나 모두가 국가 비전 실현을 위해 한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참여정부라는 명칭 그대로 모든 국민이 참여해서 같이 간다면 동북아 중심국가, 소득 2만달러 시대라는 비전 달성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몇몇 사람만 참여하는 참여정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윤 회장=21세기 첫 정부인 참여정부가 큰 기대를 안고 출범했지만, 이해 당사자들이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바람에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국민들은 오히려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반성을 거쳐 스스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는 피해자, 너희는 수혜자'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최근 젊은 세대가 앞선 세대를 부정하고, 일부 집단이 자신과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집단을 부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데, 이래서는 절대로 작금의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정리=박천호기자 toto@hk.co.kr
강석진 회장
64세 중앙대 경제학과 하버드 경영대학원 한국 제너랄 일렉트릭 회장 한국기업지배구조 개선위원 서울대 경영대학원 초빙교수 교육부 인적자원개발위원 공정거래위 정책자문위원 한국능률협회 부회장
윤병철 회장
66세 부산대 법과대 서울대 경영학과 최고경영자과정 한국개발금융 부사장 한국장기신용은행 상무 한국투자증권 회장 금융개혁위원회 위원 하나은행 회장 한국FP협회 회장
● 한국CEO포럼
한국CEO포럼은 전문경영인의 역할 재정립과 투명경영 실현 등을 목표로 전문경영인과 학계 인사들이 주축이 돼 2001년 6월 설립한 단체. 현재 170여명의 회원들이 가입했고, 매달 분과위원회별로 세미나를 통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윤병철 우리금융그룹 회장, 강석진 CEO컨설팅그룹 회장, 정광선 중앙대교수 등이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노동계 파업이 뜨거워지던 20일 창립 2주년을 맞아 파업사태를 바라보는 경제계의 진솔한 입장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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