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진 지음 우리글 발행·5,500원'숨겨두고 순결하단 말 들을까/ 들어내어 화살을 맞을까/ 태어나 아비 정 모르다가/ 서러운 어미 정 옮아올 때/ 그 사람 내게로 오네'
시인 이생진(74·사진)씨는 50년 넘게 전국의 외딴 섬을 떠돌면서 시를 써온 사람이다. 그 자신 "섬에 발붙이며 고독을 알았고 고독을 알면서 시를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혼자서 섬을 걷다가 자신만큼이나 외로운, 오래 전 여인을 만났다. 송도 최고의 기생, 웃음을 팔고 몸을 팔면서 남정네의 품으로 옮겨 다녔지만 한순간도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인. '그 사람 내게로 오네'는 황진이의 고독을 헤아리며 쓴 연작시 80여 편을 묶은 시집이다.
시인이 무엇보다 마음 아파하는 것은 황진이가 차마 흘리지 못했을 눈물이다. 이씨는 황진이가 부르지 못했을 노래를 불러주고 흘리지 못했을 눈물을 흘려준다. 마음의 한(恨)을 대신 풀어준다. '나는 가네/ 그리워도 그립다는 말 못하고/ 나는 가네'('나는 가네'에서), '풀고 가야지/ 가야금 뜯듯/ 내 가슴 뜯으며/ 풀고 가야지'('한'에서). 이씨는 황진이가 남긴 몇 편의 시를 열쇠로 삼아 눈물로 얼룩진 가슴의 문을 연다. 그 속에 사랑으로 망연한 한 여자가 있다. '한때는 소녀도 맘껏 떠돌았습니다/ 사내들 틈에 끼어 떠돌기도 하고/ 산적을 만나 벙어리짓으로 위험을 면했고/ 소리판에 뛰어들어 저도 모르는 정에 빠져/ 깊은 산골에 머물기도 하였습니다/ 그 사람과 헤어진 뒤/ 애꿎은 달만 바라보는 버릇에 지금도 멍해질 때가 있습니다'('떠돌면 떠돌수록'에서).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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