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오후 10시47분 서울 성북구 석관동의 한 건물 3층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구두굽 공장이 있던 3층에서 번진 불은 1층 페인트 가게와 주차돼 있던 차 2대 등을 태우고 10분 만에 진화됐다.불이 나자 건물을 빠져나온 공장 사장 김모(43)씨는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던 러시아인 A(33)씨를 방화범으로 지목했고, 경찰은 조사를 시작했다.
사장 김씨의 진술은 단호했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 A씨에게 그만두라고 말했고, 한 달치 월급 135만원이 밀린 것과 관련해 말다툼을 벌였는데 갑자기 A씨가 구두굽 제조를 위해 공장 안에 보관 중이던 톨루엔을 바닥에 붓고 라이터로 불을 질렀다."
경찰은 방화 동기가 뚜렷하고 목격자이자 피해자인 김씨의 진술이 명확하다는 이유로 A씨가 범인이라고 심증을 굳혔다. 하지만 A씨는 자신의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는 "'가스레인지'의 열기 때문에 갑자기 톨루엔에 불이 붙었다. 지난해 3월 한국에 들어와 이 공장에서 일한 뒤 임금 체불이 몇 번 있었지만 모두 받았고 이번에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불을 지를 이유가 없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가스레인지'가 터졌다면 폭발음이 있어야 하는데 주변에서 그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며 A씨를 더욱 몰아세웠다. 경찰은 23일 오후 '임금 체불 불만 품은 방화범 검거'라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그러나 경찰 수사의 문제점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A씨의 부인 G(32)씨의 진술을 듣고 현장을 확인한 결과, 구두굽 제조용 본드를 녹이는 데 사용되는 가스 화기가 공장 발화지점 옆에 있었던 것. 현장 상황을 전해 듣지 못한 통역이 A씨가 설명한 가스 화기를 '가스레인지'로 통역해 오해가 빚어졌다. 경찰은 그제서야 발화지점 상황도를 재구성하는 등 부산을 떨었지만, 사장 김씨가 방화 도구로 지목한 가스라이터는 현장에서 흔적 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관련자들의 진술과 현장상황이 엇갈리는데도 경찰은 23일 "톨루엔통과 피해자 진술이라는 물적·인적 증거가 있다"며 A씨에 대해 방화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변호사의 도움조차 받지 못한 A씨는 결국 구속됐다. 부인 G씨는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출입국 관리사무소에 인계돼 추방될 날 만을 기다리고 있다. 27일 현재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는 A씨는 그 동안 공장 내 작은 방에서 기거하며 지낸 1년 동안 모은 돈이 모두 불에 타는 바람에 빈털터리 신세가 됐다.
서울지방변호사회는 A씨의 딱한 사연을 전해 듣고 사건 진상을 파악, 변호에 나서기로 했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김이경기자 moonligh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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