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내린 24일 오후 서울 용산 주한미군 기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저녁을 맞이하고 있었다.일과를 마친 몇몇 미군은 식당에서 가족과 함께 저녁을 즐기고 있었고, 일부는 극장으로, 또 일부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용산기지 내 상가에 진열된 제품은 식빵에서부터 음료수 하나까지 모두 미국에서 직접 공수해온 것들이다. 백인 흑인이 뒤섞인 사이에 한미연합사 소속 한국군과 카투사(주한미군 배속 한국군)는 '소수민족'이다. 단층 건물들로 구성된 용산기지는 전형적인 미국 소도시의 모습이었다.
'서울 속 미국' 용산기지 이전은 거창하게는 한·미 동맹 관계 변화의 일대 전기이지만 현실적으로는 하나의 도시를 해체하는 작업이다.
"워싱턴 중심에 대규모 군사시설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아마 미국 국민들은 벌써 들고 일어났을 것이다." 미군 장병들은 이런 말로 기지 이전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1년 단위로 한국에 체류하고 떠나는 주한미군들은 만나는 이마다 이 말을 되풀이했다.
이 말의 원조는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성조기가 찢기고 친미와는 거리가 있던 노무현 정부 출범을 앞둔 올해 초 그는 다분히 감정 섞인 이 같은 말로 용산기지 이전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리고 4월과 6월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협의를 통해 양국은 이르면 올해 말부터 용산기지 일부 부서와 시설을 오산·평택으로 이전키로 합의했다.
한·미 양국군의 심장부인 용산기지(용산 개리슨·총 70만여 평)에는 1977년 창설된 한미연합사령부와 주한미군사령부, 미8군사령부 및 전쟁지휘소인 지하 벙커 'CC 서울' 등이 있다. 한미연합사령부가 위치한 메인 포스트는 약 20여만 평. 초·중·고교에서부터 특급호텔 수준인 드래곤 힐 호텔, 영화관, 병원과 주한미군 관사 등 자족도시처럼 꾸며진 사우스 포스트는 약 50만 평이다.
현재 용산에는 6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북쪽 기지(메인 포스트)와 남쪽 기지(사우스 포스트)를 잇는 길이 36m짜리 차량용 구름다리 공사가 한창이다. 이전하는 마당에 무슨 공사일까 하는 의문에 대해 주한미군 김영규 공보관은 "모레 떠나더라도 내일 하루 장병들의 편의를 책임진다는 것이 미군의 문화"라고 설명했다.
반 세기 동안 한미동맹의 상징으로 자리해 온 용산기지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 7,000여 병력 중 6,000여 명이 중장기적으로 용산을 떠나고 주한미군사령부와 연합사 필수 요원 1,000명만 남게 된다. 당연히 부지도 대폭 축소된다. 서울시는 환수받는 용산기지를 서울의 중심 공원으로 만들기로 했다.
한미연합사의 한 한국군 장교는 "19세기 말 이후 용산은 주인만 바뀌었을 뿐 외국 군대가 번갈아가며 주둔했던 곳"이라며 "주한미군의 상징인 용산기지가 공원으로 바뀌면 이 일대의 속칭인 해방촌이라는 표현대로 진정한 '해방'을 맞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정호 기자 azure@hk.co.kr
■허바드 주한美대사 기고
본 조약의 당사국은 모든 국민·정부와 평화적으로 생활하고자 하는 희망을 재인식하며 또한 태평양지역에 있어서의 평화기구를 공고히 할 것을 희망하고 당사국 중 어느 일방이 태평양지역에 있어서 고립하여 있다는 환각을 어떠한 잠재적 침략자도 가지지 않도록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에 대하여 그들 자신을 방위하고자 하는 공통의 결의를 공공연히 또한 정식으로 선언할 것을 희망하고 또한 태평양지역에 있어서 더욱 포괄적이고 효과적인 지역적 안전보장 조직이 발생될 때까지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자 집단적 방위를 위한 노력을 공고히 할 것을 희망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한미방위조약서문
지난 반세기 동안 한미 양국이 더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공조해 오면서,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이 서두는 한미 동맹의 기본 원칙이 되어왔습니다. 올해 한미 양국은 이 조약을 바탕으로 발전해 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라고 칭해지는 동맹의 50주년을 기념하게 됩니다. 50년 전 조인된 휴전협정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 새 출발을 가능케 하였다면 상호 방위 조약은 전 세계 평화와 자유의 증진을 추구하며 같은 길을 걷는 양국의 결연한 의지를 상징해 왔습니다.
1953년 여름에 맺어졌던 이 중요한 두 조약의 바탕이 되어온 상호 존중과 협력의 정신은 50년간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오늘날 양국은 자유무역의 원칙을 존중하며, 상호 협력 하에 세계의 가장 큰 경제대국 중 하나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은 현재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이며, 인터넷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국가이고 성숙한 민주주의 체제가 운영되는 나라입니다. 양국은 광범위한 공동의 가치와 원칙들을 공유하며 이 가치를 증진시키는 의무 등과 같이 국가적 성공이 수반하는 책임을 다해나가고 있습니다. 동티모르,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자국의 경험과 지도력을 활용하여 국제사회에 공헌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억압과 독재를 민주주의로써 굴복시킨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미국은 한국이 동일한 기회를 이라크 국민들에게도 열어줄 국제연대에 참여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테러리즘을 근절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어줘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미국은 안보상의 도전들을 헤쳐나갈 때에 한국이 제공해 줄 도움의 손길을 따뜻하게 환영하는 바입니다.
동맹 50주년을 맞는 지금 우리가 향후 50년의 도전과 기회에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일은 합당한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한국과 전 세계 다른 지역에서 과거와는 다른 위협에 직면해 있으나 우리 병력의 전력 또한 지난 몇 년에 비해 극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처음부터 동맹의 토대가 되었던 안정과 전쟁억지력에 대한 결의를 유지함과 동시에 병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배치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재차 언급한 바와 같이 한반도 및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강력한 전진 배치 병력을 유지한다는 미국의 의지는 지금도 굳건합니다. 미국은 지난 50년 동안 한국과 함께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전쟁 억지력에 대한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합니다만 더 강해질 수 있고 더 강해지리라고 믿습니다.
북한 핵무기 위협은 평화와 안보를 저해하는 도전 과제입니다만, 양국은 이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함께 해결해가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동시에 북한의 위협이나 우리 동맹을 현대화시키는 도전 등 모든 이슈를 해결해나가는 데에 있어 양국의 긴밀한 의견 조율과 협력이야말로 성공의 열쇠라고 봅니다.
한미 양국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전세계적 확산이라는 정당한 목적을 공유한다는 자긍심과 상호 신뢰 속에서 한미 동맹의 향후 50주년을 내다봅니다. 양국이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볼 때에 차세대 지도자들은 우정과 협력의 역사가 자신들의 미래에도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양국 차세대 국민들은 민주주의, 평화, 그리고 번영의 증진에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같은 미래의 공동 역할이야말로 향후 우리 양국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 것입니다.
■주한미군 섭외부장 조지 김
주한미군사령부 섭외부장으로 일하는 한국계 미국인 조지 김(70·사진)씨는 용산기지의 산증인이다. 미 몬태나 주 화이트 홀 출신인 그는 1955년 서울의 미군정보부대에서 사병으로 복무한 뒤 61년 서울에 정착, 줄곧 용산 기지를 지켜왔다.
결혼도 기지 내 교회에서 했고, 자녀 3명 중 2명을 출산한 곳도 미8군 병원이었다. 김씨는 "용산 기지 이전은 이미 10년 이상 논의돼 왔던 사안인데 북핵 문제 등으로 미뤄져 왔을 뿐"이라며 기지 이전의 섭섭함을 달랬다.
그는 40년간 변하지 않는 기지 보다는 극심한 변화를 겪었던 기지 밖 세상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이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 미군은 당연히 우월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면서 "그러나 이제는 주한미군의 대(對) 한국관이 정말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의 주 업무는 주한미군의 한국가정 체험, 한국인 부대초청 행사 기획 등으로 한국인과 주한미군의 가교역이다.
40년 넘게 때로는 미군의 시각에서, 때로는 한국인의 관점에서 양측을 바라본 그는 지난 해 촛불시위에 대해 "여중생의 죽음에 대해 주한미군들이 진심으로 슬퍼했다는 사실을 몰라주는 한국민이 많아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김정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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