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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꿈 녹아있는 원전에 충실"/황석영 "삼국지"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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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꿈 녹아있는 원전에 충실"/황석영 "삼국지" 출간

입력
2003.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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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통에 대구로 피난 간 초등학생은 종종 반 친구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를 들려줬다. 세 호걸이 도원에서 잔치하면서 의형제를 맺는 것으로 시작됐다. 어찌나 재미있게 얘기했던지 전교에 유명해져서 다른 반 아이들이 몰려왔다. 25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소설가 황석영(60)씨는 "전쟁 중에 아이들에게 삼국지 이야기를 해주던 때가 이야기꾼으로서의 내 전성기였을 것"이라면서 웃었다.황씨가 옮긴 나관중의 '삼국지'가 전 10권으로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됐다. 방북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던 1997년 면회 온 문인들의 권유로 "수감 생활의 고달픔을 이기려고 시작했던 작업"이다. 꼬마 이야기꾼의 밑천이었던 '정음사판 삼국지'(박태원 역)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박종화의 '월탄 삼국지'도, 이문열 평역 '삼국지'도 받았다. 여러 번역본을 비교하면서 읽다가, 원문의 맛과 결을 살리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그는 옥중에서 먼저 원고지 2,500매, 두 권 분량을 우리말로 옮겼다. 감옥에서 나와선 작업이 조금 더뎌졌다. "소설 창작을 재개하면서 번역 작업을 함께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지치기도 했다. 그런데 번역 후반부에 들어서자 꼭 마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더라. 여러 가지 번역본을 보면서 '삼국지 표준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석영 삼국지'를 '표준 삼국지'로 삼는다는 목표를 세웠다."

황씨가 원본으로 삼은 것은 1999년 상하이(上海)에서 출간된 판본이다. 그는 '원전에 충실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사실적·객관적인 문체의 특성을 살리되, 원문에서는 밋밋하고 간략하게 묘사된 전투 장면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황석영 삼국지'에서 장수들은 한순간 한순간 목숨을 걸고 전투한다. 펄펄 살아서 천하를 호령한다. 이야기 중간중간 삽입된 한시(漢詩) 210수가 원문과 함께 번역 수록됐다. 임형택 성균관대 교수가 한시 번역을 감수했고 전홍철 우석대 교수가 텍스트 교열 작업을, 중국 화단의 원로 왕훙시 화백이 삽화를 맡았다.

무엇보다 황씨가 '표준'으로 내세우는 것은 원본의 역사 의식이다. 한중 파촉을 대번에 차지할 수 있었음에도 유비는 대의명분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가까스로 기반을 마련한다. 관운장은 온갖 영예를 뿌리치고 조조를 떠나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다섯 장수의 목을 베면서 유비를 찾아간다. 제갈량은 유비와의 약속 때문에 어리석은 유선을 보필하다가 위나라 정벌을 떠나기에 앞서 출사표(出師表)를 올린다. 유비 관우 장비와 제갈량은 이렇게 인덕과 의리를 추구했지만 실패하고 좌절했다.

황씨는 이 실패한 영웅들의 이야기에서 구원을 바라는 백성의 염원을 보았다.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민중의 꿈과 소망을 보았다. 그는 집필 내내 1970, 80년대 한국일보에 역사소설 '장길산'을 연재하던 때가 생각났다고 했다. '장길산'은 분단시대, 유신시대에 씌어진 작품이다. 그는 "소설에 그려진 시대가 아니라 작가가 어느 시대에 썼는가 하는 것이 역사소설의 의의"라면서 "작가의 글을 읽는 당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 쓰여지는 중국 호걸들의 이야기의 의의는 근대 이후 잊혀진 동양적 가치의 회복이다. 그는 "황석영 삼국지가 동양 문명의 뿌리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이문열씨의 '삼국지'가 의식되지 않느냐는 질문이 던져졌다. 그는 "맥주도 생맥주, 흑맥주 등 종류가 다양하지 않느냐. '삼국지'도 옮긴 사람에 따라 읽는 맛이 달라지는 것"이라면서 "그보다 '삼국지'라는 텍스트가 이토록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옮겨져 온,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게 놀랍다"고 말했다. 15일 시작된 인터넷 서점 예약 판매 부수는 열흘 만에 벌써 800질을 기록했다. 유례 없이 뜨거운 반응이라고 출판사는 전한다. 황씨는 "10월께 한국일보 연재 중인 '심청, 연꽃의 길'을 단행본으로, 10권 분량의 '청소년 장길산'을 낼 것"이라면서 "그 후 '열국지'를 옮겨볼까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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