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65> 소설가 박상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65> 소설가 박상우

입력
2003.06.26 00:00
0 0

당신은 왜 문학을 하는가. 백 명의 작가에게 물어 보라. 백 가지 대답이 나올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초적으로 대답하기 불가능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대답을 한다고 해도 온전한 대답이 될 수 없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모른다는 것뿐이라는 식의 대답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질문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왜 태어났는가라는 질문과 뭐가 다른가.

문제의 핵심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있다. 그것도 역시 백 명의 문인에게 질문하면 백 가지 대답이 나올 것이다. 소설을 예로 들어보자. 교과서에서는 '소설은 픽션'이라고 정의한다. 중·고등학교 시험에 빈번하게 출제되는 문제이다. 하지만 내가 작가가 되어 경험해 본 바로는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 세상에는 완벽한 픽션, 완벽한 허구란 없다. 인간의 두뇌에서 일어나는 경험과 상상 사이의 미묘한 화학작용과 삼투작용이 모든 걸 결정한다. 그것을 분해하거나 분석했다는 학자를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왜 문학에 심취하게 되었는지 나는 설명하지 못한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 이층 난간에 서서 해 지는 서쪽 하늘을 내다보며 막연하게 이 다음에 글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자기 다짐을 했지만 그것에 대해서도 설명하기 어렵다. 초등학교 5학년 놈이 대체 문학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아주 간단하게 운명적 프로그램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하다. 그런 걸 팔자라고 해도 좋고, 업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 게 없다면 아무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하기 싫다는 놈에게 문학을 강제할 수 없고, 하고 싶다는 놈에게 문학을 금기시할 수 없는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이후 나는 오직 글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작심만으로 세상을 견뎌왔다. 숱한 곡절과 파란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끝끝내 나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속내를 드러내지도 않은 채 오직 인내심을 키우는 세월이 지나갔을 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가서 제대하고, 광산촌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동안 나의 생각은 끝끝내 변하지 않았다. 결국 끔찍하고 지리멸렬한 나의 열망은 자살 일보 직전에 성취되고 말았다. 신이 나를 살려 더 괴롭히기 위해 등단시킨 것 같았다. 후후, 이제는 웃으며 이런 말을 한다.

젊은 날 나는 문학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의 종교라고 믿었고, 그것이 나의 구원이라고 믿었다. 작가가 되고 난 뒤에도 그 생각에는 오랫동안 변함이 없었다. 죽어라 글만 쓰고, 글을 통해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을 통해 몇 가지 깨달은 게 있었다. 나에게서 벗어나 작가와 소설과 세상 사이의 함수관계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었다.

소설은 혼자 시작해서 혼자 끝내야 하는 지난한 마라톤이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인간과 인생에 대해 탐구하고 고심한다. 이 세상의 모든 소설이 그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생을 다루지 않는 소설은 없다. 그것을 다루지 않으면 소설이 아니고, 그것이 빠지면 애당초 소설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소설의 특장인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분야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이다. 작가 의식이 이쯤 이르게 되면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좁은 자아에서 벗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문학에 대해 지니고 있던 맹신과 과도한 열정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술 마시며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하며 살아온 날들을 되새김질하게 된다.

소설에 대한 과도한 열정을 다스리며 30대를 보냈다. 내 소설에서는 낭만적 기질과 감성적 군더더기가 스러졌다. 냉랭한 각성과 서늘한 이성의 기운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문체가 달라지고, 소설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소재와 주제가 달라졌다. 결국 압축과 절제가 최고의 미덕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덕분에 말수가 줄어들고, 감정적 절제가 이루어졌다. 세상에 대해 섣부른 기대도 하지 않고 허망한 원망도 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제 나는 문학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학 자체가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에 도달한 때문이다. 문학은 인간과 인생을 캐는 한 자루의 호미일 뿐이다. 그것은 도구이자 수단이지 그것 자체가 절대적 가치가 아닌 것이다. 문학에 대한 신앙심으로 날려보낸 숱한 불면의 밤들, 문학에 대한 과도한 열정으로 치렀던 숱한 논쟁들, 문학의 이름으로 만들어냈던 숱한 면죄부들이 이제는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닳아버렸다. 하지만 그런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면 지금 이런 말도 입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버려야 하는 바로 그것을 통해 인간은 배우는 존재가 아닌가.

나는 이제 소설에 쫓기지 않는다. 10대, 20대, 30대는 내내 그것에 쫓기고 쟁투하며 살았다. 정말 힘겹고 역겹고 숨막히는 세월이었다. 나의 정체를 모르고 또한 소설의 정체를 모른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그것에 쫓기지 않고, 그것과 함께 살아간다. 예전처럼 소설이 '쓰기의 산물'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모든 소설은 쓰기가 아니라 '짓기의 산물'이어야 한다. 새빨간 거짓이지만 진실을 추구하고, 꿰맸지만 꿰맨 자리가 보이지 않는 비법은 거기서 나오는 것이다.

작가가 잘못 가면 잡가(雜家)가 된다. 소설가가 아니라 요설가나 독설가, 혹은 망나니나 개차반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자기가 시작한 일이고 자신이 매듭지어야 할 일이니 무엇이 옳고 그르다 말할 수 없다. 문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어차피 인간의 손에 의해 신의 경지에 이른 소설은 씌어질 수 없다. 이것이 소설이다라고 죽기 전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도 없다. 소설만 그런 게 아니라 무릇 세상의 이치가 그와 같은 것이다.

작가가 자신에게 갇힐 때, 문학은 작가의 감옥이 된다. 감옥에 갇히지 않기 위해 작가는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자신의 존재 좌표를 인식하고 자신의 현재 위치를 가늠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도덕군자가 되기 위해 작가가 된 게 아니다. 이 세상의 특정한 편을 들기 위해 작가가 된 것도 아니다. 나의 오른쪽 어깨 위에는 천사가 앉아 있고, 왼쪽 어깨 위에는 악마가 앉아 있다. 물론 나는 어느 편도 아니다. 필요에 따라 악마에게 귀 기울여 주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천사에게 귀 기울여 주기도 한다. 그것을 위해 나는 항상 악마와 천사의 경계지점에 위치한다. 그곳이 작가라는 이름의 연출가가 머물러야 할 위치이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면 악마와 천사가 탱고를 추게 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악마와 천사가 섹스를 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것이 도식적 세상을 뛰어넘는 예술적 방식, 내가 터득한 소설가적 복무방식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나는 문학적 변신을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더 오래, 더 멀리 가기 위해 전반적 체제 정비를 한 셈이다. 작품을 쓰고 책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세상을 견디는 게 아무리 어려워도 작가로서의 자기 당위성만은 든든하게 다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소설작업이 막노동과 하등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소설이 정신 노동이라는 걸 인정하고 또한 예술이라는 걸 인정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자기 철학의 부재가 결국 자기 문학을 스스로 비하하거나 자만하게 만드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

나는 내가 왜 문학을 하는지 모른다. 또한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단정적으로 말하지 못한다. 그것이 내가 문학을 하는 진정한 이유인지 모른다. 그것이 명쾌하고 분명한 것이었다면 아주 오래 전에 문학을 접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문학의 진정한 매력은 모르면서도 가게 하고, 가도가도 끝이 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제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돌아갈 수도 없고, 살아오며 다른 길을 터득하지 못했으니 샛길로 빠져나갈 수도 없다, 다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있을 뿐이니 죽는 날까지 말없이 그 길을 가고싶다. 소설을 통해 인간과 인생을 캐는 평생의 작업…. 저물녘 빈 들판에 호미 한 자루 들고 선 늙은 농부의 모습에서 나는 인생의 과정을 충실하게 살아낸 장인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것이 나의 말년 모습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 연보

1958년 경기 광주 출생 1982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1988년 중편 '스러지지 않는 빛'으로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당선 등단 소설집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독산동 천사의 시' '사탄의 마을에 내리는 비' 장편소설 '호텔 캘리포니아' '청춘의 동쪽' '까마귀떼 그림자' 산문집 '내 영혼은 길 위에 있다' 등 이상문학상(1999) 수상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