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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삭발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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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삭발하지 맙시다

입력
2003.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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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도 화나면 단체 삭발합니다.' 제목이 이채로웠다. 지난달 어느 대학 교수 21명이 재단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매일 한명씩 릴레이 삭발로 저항했다는 기사였다. 얼마나 절박했을까, 여교수도 두명 들어 있었다. 16명의 머리칼이 잘리고 나서야 학교측은 면담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삭발은 위력이 있는가. 조흥은행 파업에는 5,000명 가까운 노조원이 배코를 쳤다. 삭발한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다른 동료의 머리를 깎는 모습은 차라리 눈물겨운 퍼포먼스였다. 이에 앞서 전북지사 등 30여명도 새만금 사업 중단을 막기 위해 머리를 잘랐다. 전북지사는 삭발한 공직자 중 최고위 관료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삭발은 이제 제발 중지됐으면 한다. 멀쩡한 머리를 무르팍 같이 만드는 삭발은 세상까지 삭막하고 살벌하게 만든다. 누군들 좋아서 삭발을 할까마는, 또한 삭발을 해야 할 절박한 사정이 없으면 더 좋겠지만, 삭발은 동기가 순수해도 엄연한 폭력이다. 타인에게 행사하고 싶은 폭력적 욕망을 자신에게 방향전환 시키는, 자해적 행위와 다르지 않다. 젊은이들의 멋내기 삭발이나, 일시적 반항의 표시로 배코 치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가능한 희망인지 모르겠지만, 불교 승려들조차 머리를 길렀으면 좋겠다.

■ 세상은 민주화하고 살기 좋아진다는데, 왜 다툼의 방식은 더 모질고 그악스러워지는 걸까. 사회적 행동방식이 왜 갈수록 이성과는 멀어진 채 격렬하고 황폐해지는 걸까. 삭발 전에는 단식 투쟁이 잦았고, 지난해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 때는 항의수단으로 집단혈서까지 등장해서 경악케 했다. 새만금 사업을 막기 위한 성직자들의 삼보일배(三步一拜) 행진에도 선뜻 찬성할 수가 없다. 고통과 겸손을 내면화하여 많은 이들을 감동 시켰지만, 고난에 찬 이 행진 역시 본질은 폭력이었다고 생각된다. 삼보일배의 숨은 폭력적 요소가 전북지사의 삭발이라는 또 하나의 대응폭력을 부른 셈이다.

■ 단식과 삭발, 혈서는 집단정서의 표출이다. 월드컵 축구대회 때 우리는 국민이 일체가 되어 뿜어내는 감동을 맛보았다. 축구공 따라 뛰고 치솟던 순수한 열광은 세월이 가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 1년 뒤인 얼마 전, 당시의 국민적 역동성에 관한 세미나가 열렸다. 긍정적 평가가 주류를 이룬 가운데 비판적 지적이 있었다. 월드컵은 지나칠 정도로 집단행동을 하는 잘못된 인식을 확산시킬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회가 너무 조급해지고 있다. 들끓는 집단적 욕망을 추스를 서늘한 이성이 필요하다.

/박래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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