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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르포 / 되돌아본 납치공포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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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르포 / 되돌아본 납치공포 6월

입력
2003.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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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괴, 납치는 벼랑끝 범죄라 불린다. 벼랑에 내몰린 이들이 최후의 카드로 뽑아드는 범죄인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벼랑 끝에 선 이들이 많은 사회 일수록 빈발할 수밖에 없다. 범죄학의 정설은 '지금까지 성공한 유괴범은 없다'이다. 유괴범은 반드시 잡힌다. 다만 그 과정에서의 희생이 문제다. 불나방 같은 범인은 선량한 피해자마저 벼랑으로 함께 내모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빈발한 사건으로 '납치정국'으로 불린 6월, 최근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 유괴 납치 범행을 들여다봤다.전직 은행원의 뒤늦은 후회

12일 오후3시, 경기 남양주시 도농동 한 초등학교 앞에 검은색 중형 승용차 한대가 섰다. 주위를 살피던 운전자 K(40)씨는 초등학생 한명에게 말을 걸었다. "너희 집 어디니? 아저씨하고 같은 곳이네. 태워 줄께." 아이를 태운 승용차는 왔던 길을 되짚었다.

K씨는 2001년까지 서울 한 은행의 개인고객팀장이었다. 차장 승진을 앞두고 있던 그는 세기말에 불어 닥친 코스닥 열풍으로 짭짤한 재미를 봤다. 단타매매만 전문으로 하면 큰 돈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아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그로부터 1년 사이 그는 벌어둔 돈을 포함해 7억원을 날렸다. 공무원 아버지와 교사 누나의 퇴직금까지 날렸다.

문제는 3,000만원의 사채였다. 그날도 사채 이자 80만원을 입금하고 나오던 길이었다.

아이를 데려가던 K씨는 공중전화를 찾아 아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아버지 뭐하시니?" 아이는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회사 그만두고 집에서 놀아요." 이번엔 아이 어머니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생각 못한 낭패였다. K씨는 한숨을 내쉰 뒤 아이를 내려 놓았다.

다음날 낮 12시30분, 이번에는 남양주시 와부읍의 한 초등학교에서 1학년 학생을 차에 태웠다. 공중전화를 찾아 아이 아버지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두방망이질 해대는 가슴을 달래며 읊었다. "아이를 데리고 있다. 3,000만원을 주지 않으면…." 저쪽에서 차가운 음성이 날아왔다. "3,000만원이 아니라 300만원도 없다." 의외였다. 낭패감, 당혹감이 밀려들었다.

자리를 옮겨 이번엔 아이의 엄마에게 전화했다. "경찰에 신고하면 아이가 위험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심장이 심하게 뛰었다.

수 차례 공중전화를 옮겨 다녔고 먼 거리를 돌아 퇴계원에 차를 댔다. 오후 6시. 초등학생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이는 유괴된 줄도 모르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경찰관 2명이 차로 다가서는 게 보였다.

K씨는 경찰에서 "자살하러 한강에도 갔었다. 뭐가 씌었던 모양이다"며 울었다.

가짜 학원교사 "300만원만 달라"

인천 부평구 십정동에서 유괴 사건이 났다는 신고가 들어온 것은 4일 오후6시께였다. 학원에 갔던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고, 대신 어머니의 휴대폰으로 '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문자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정작 경찰을 당황하게 한 것은 범인이 요구한 액수였다. 300만원. "애를 유괴해 가서 그 돈을 요구하다니…. 뭐가 있는 것 아냐?" 전화 통화도 오래 끌지 않았다. 프로 범죄꾼의 냄새가 났다.

밤9시께 은행 현금 자동지급기 마감시한을 앞두고 범인은 계좌번호를 부르며 최후통첩을 전해왔다. 가족들은 즉각 돈을 입금시켰고 잠시 후 돈이 빠져나간 것이 확인됐다.

아이는 그 직후 돌아왔다. 아이는 "학원 선생님과 같이 있다가 왔다"고 했다. 경찰은 곧장 학원에 있던 교사의 신상 서류를 들고 찾아 나섰지만 가짜였다. 범인은 공중에 떠버렸다.

경찰은 범인이 휴대폰을 집중적으로 사용했던 지역을 탐문해 들어갔다. 은행 계좌만큼은 자기 이름을 사용한 것이 확인됐다. 10시간 여 탐문 끝에 연수구의 한 원룸에서 이삿짐을 정리하던 범인 P(23·여)씨를 검거할 수 있었다.

P씨는 몇 달에 걸쳐 준비했다. 훔친 주민등록증으로 서류를 만들어 학원에 취직, 아이들을 두루 꿰고는 한달 만에 그만뒀다. 휴대폰도 훔친 주민등록증으로 만들었고 살던 원룸도 옮겼다.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자신했다. P씨는 경찰에서 "300만원만 요구하면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했다.

인질 모른척 일관 생명 건져

4일 오후 3시30분께 인천 연수구 연수1동 주택가 A(41)씨 집에 20대초반 괴한 2명이 침입했다. 파출부를 묶고 집안을 뒤지던 괴한들은 집안에 별다른 것이 없자 학교를 파하고 귀가한 A씨의 딸(8)을 납치했다. 범인들은 이후 장소를 옮겨 다니며 공중전화를 이용해 A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금 3억원을 준비해라. 경찰에 신고하면 딸의 안전을 장담하지 못한다."

이후 치열한 심리전이 벌어졌다. 범인이 요구한대로 돈을 줘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두고서도 경찰과 가족들은 갈등해야 했다. 9일 벌어졌던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여대생 납치사건에서도 범인들은 가족으로부터 돈을 건네 받은 직후 인질을 죽였다. 특히 A씨의 딸을 데려간 괴한은 강도를 하러 들어온 영락없는 프로 범죄꾼들.

5일 밤. 범인의 목소리는 흥분돼 있었다. "돈을 들고 제2경인고속도로를 타라. 휴대폰으로 지시를 받으라"고 했다. 그리고 인질로 잡힌 딸의 목소리가 휴대폰을 탔다. 납치범들이 가족을 압박하는 최고의 수단은 인질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A씨는 순간 극도로 흥분했고 경찰에 신고한 것마저 후회했다.

경인고속도로를 타면서 휴대폰으로 범인들의 지시를 받던 A씨는 멀찌감치 따라오는 경찰을 따돌릴 생각까지 했다. A씨는 범인 중 한명에게 고속도로 갓길에서 현금 5,000만원을 건넸다. 경찰은 범인에게 접근도 못했고 차량 번호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그리고 피말리는 상황 속에 무심히 시간이 흘렀다. 새벽4시반. 딸은 집 근처에 내려졌다. 돈을 건넨 지 1시간 만이었다.

이유는 돌아온 딸을 통해 드러났다. 여덟살 인질은 "칭얼대면 아저씨들이 어떻게 할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소변이 마려워도 참았다"고 했다. 노련한 범인들 앞에서 어린 인질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어보였다고 했다. 인질을 풀어 보내기 직전 범인은 "우리 얼굴 기억할 수 있겠어?"라고 물었다. 어린 인질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전혀 모르겠는데요."

낙천적이고 영민하기까지 한 어린 인질은 하지만 이후 심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글=이동훈 기자 dhlee@hk.co.kr

사진=최흥수기자

● 내가 납치됐다면…

성공 확률은 0에 가깝고 그 반대 급부는 엄청나게 크다. 경찰은 '유괴 납치'로 돈을 뜯어내려는 범인의 8,9할은 초범자라고 말한다.

4일 인천 연수구 사건처럼 강도가 납치범으로 돌변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따라서 "사건이 터지면 가족들은 무조건 경찰에 신고부터 하라"고 강조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강덕지 범죄심리과장은 "'경찰에 신고하면 인질이 다친다'는 얘기는 범인으로서도 무심결에 던지는 압박수단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전적으로 돈이 목적인 유괴범이 인질을 살해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인질을 관리하기가 힘든 경우와 돈을 넘겨 받은 뒤의 증거인멸 차원이다. 만약 인질이 됐을 경우 인질범이 관리하기 귀찮고 힘들게 느끼지 않도록 할 것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하라고 강 과장은 강조한다.

나머지는 가족·경찰 대 범인의 밀고 당기는 심리전이다. 극도의 긴장 상태인 범인들은 이쪽의 대처 방법에 따라 반드시 실수와 허점을 남기게 마련이다. 남양주 사건의 경우에도 아버지의 당당한 대처가 오히려 범인을 당황하게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가족들은 경찰의 수사기법에 맡기고 따라가면 그만이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운 유괴범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잡히게 돼있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찰력은 인질범의 심리 분석 등을 통한 신속한 상황 대처와 인질을 사이에 둔 대치 시간을 줄이는데 있어 아직은 초보 수준이라고 범죄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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