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부활 움직임은 '위대한 강대국 러시아의 재건'을 기치로 내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등장과 궤를 같이 한다. 실제로 그의 적극적인 상트 페테르부르크 챙기기에 힘입어 오랜 기간 동안 모스크바에 가려졌던 이 도시의 정치·경제적 위상이 급속히 증대되고 있다.이와 함께 푸틴의 후원 하에 중앙의 정·재계를 장악한 이른바 '피테르 마피아'(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 권력집단)들이 중심이 되어 모스크바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의회와 수도를 이전하자는 논의까지 제기되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로의 천도 논의가 고개를 드는 것은 2003년이 시 창건 300주년이고 푸틴 대통령이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이라는 피상적인 요인 때문만은 아니다.
우선 상트 페테르부르크로의 천도는 '철의 장막'으로 상징되는 과거 소련이 간직했던 부정적인 국가 이미지를 탈각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냉전의 종식과는 상관 없이 국제사회는 여전히 러시아를 '악의 제국'으로 표현되는 소련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려는 사고의 관성을 간직하고 있다. 소련 붕괴 이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폐기하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국가 지배이데올로기로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여년 간 러시아는 서방세계와의 고립에서 완전히 탈출하는 데 실패했다. 따라서 서구적 인권과 가치관을 준수하는 신 국가 이미지를 정립하기 위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의 천도가 효과적인 돌파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판단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과거의 역사를 부정하고 새로운 역사를 열겠다는 단절 의지 또한 천도 논의의 배경으로 거론된다. 러시아는 988년 기독교를 수용함으로써 유럽세력의 일원으로 편입됐다. 그러나 240여년 동안의 몽골지배(1240∼1480년)는 유럽세계와의 단절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 아시아적 후진성을 남겨놓았다. 이런 몽골시대의 역사적 잔재를 극복하고 러시아 국가의 정체성을 유럽과 일치시키기 위해 표트르 대제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고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 서구화를 지향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등장한 모스크바 중심의 소비에트 체제 또한 서방과의 이념적 갈등과 정치적 단절을 초래해 유럽세계와 격리됐다는 측면에서 몽골지배 시대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역사적 '변종'이었다. 이렇게 볼 때 푸틴 시대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천도론의 이슈화는 소비에트 역사를 극복하고 서구적 발전모델의 수용을 통해 낙후된 러시아의 서구문명 세계로의 편입과 함께 유럽적 정체성을 재정립하려는 강한 의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현실적인 면에서는 수도 모스크바의 지나친 비대화와 권력의 집중화가 야기하는 비효율성을 제거해야 한다는 인식의 증대가 천도론 제기를 이끌었다. 러시아는 독일이나 미국처럼 다극적·다(多) 중심적 연방주의 정치를 운영해본 경험이 없다. 특히 소비에트 시절 모스크바는 러시아 국가예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불가사리로 변했는데 이는 국가의 성장과 균형발전 측면에서 지대한 결함이 아닐 수 없다. 러시아는 미국의 워싱턴과 뉴욕, 중국의 베이징과 상하이, 일본의 동경과 오사카의 경우처럼 상업과 행정을 분리하여 두 거대 도시를 축으로 성장의 동심원을 확산시키는 효율적인 발전전략이 결여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21세기 야심찬 국가발전 대전략을 강구하고 있는 푸틴과 그 주변에 포진한 정치 엘리트들은 모스크바의 비대화와 과도한 권력집중 현상의 해소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절감, 수도기능의 분산차원에서 천도문제를 끄집어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또한 냉전 종식 이후 수도 이전을 단행한 인근 독일과 카자흐스탄 등의 국제적 선례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1994년 6월 헬무트 콜 정부는 독일을 새로운 유럽의 정치 중심국가로 끌어올리기 위해 본에서 베를린으로의 천도와 연방의회 이전을 결정했다. 구 소연방의 일원이었던 카자흐스탄도 주권회복을 맞이하여 1998년 알마아타(현 알마티)에서 아스타나로 수도 이전을 단행한 바 있다. 이런 일련의 국제적 선례가 상트 페테르부르크로의 천도와 의회 이전 문제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상트 페테르부르크로의 의회 및 수도 이전은 라이벌 모스크바의 견고한 저항, 천문학적인 예산확보 문제 등의 제약으로 인해 구체화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도 논의는 소련연방 해체 이후부터 제기되어 왔고, 특히 푸틴의 등장과 함께 유력 정·재계 인사들 사이에 조심스런 가운데서도 신중히 논의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는 수도 이전의 성사 여부를 떠나 모스크바에 고착된 러시아의 제반 국가권력이 향후 점진적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흘러들어갈 것이라는 점을 예고하는 것이다.
홍 완 석 한국외대 노어과 교수
● 천도론 전개 과정
상트 페테르부르크 천도론은 2000년 5월 이후부터 본격 부상하기 시작했다. 1999년 12월 31일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총리가 대선에서 승리, 정식으로 대통령이 된 시기이다.
푸틴 대통령은 권한대행 때부터 소련 시절 자신이 근무했던 KGB(국가보안위원회)·FSB(연방보안국) 출신들과 함께 고향인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들을 대거 정계에 포진시키며 완벽한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부처 장관급 중 3분의 1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으로 채워졌다.
그는 대통령 권한대행이던 2000년 3월 11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정상 회담을 가졌다. 러시아 지도자가 된 뒤 가진 첫 서방 정상과의 회담이었다. 이 때만 해도 이 회담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 당선자 시절이었던 4월 모리 요시로(森喜朗)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도 모스크바가 아닌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되자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정가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2000년 5월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인 겐나디 셀레즈뇨프 하원(국가두마) 의장은 "모스크바 의회 건물이 좁고 불편하다"며 "의사당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겨갈 수도 있다"고 운을 뗐다. 그는 중앙은행, 문화부 등 몇몇 정부 부처도 함께 이전할 것을 제안했다. 권한대행 시절 "수도 이전은 불합리하고 너무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라고 지적한 바 있던 푸틴은 이에 대해 "재미있는 생각"이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후 수도 이전 방안을 의회에서 공식 논의키로 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왔으나 모스크바 측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더 이상 발전하지는 못했다.
2001년 12월에는 역시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세르게이 미로노프 상원 의장이 수도 이전 문제를 언급하는 등 천도 문제가 간헐적으로 제기돼 왔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창건 300주년을 맞은 올해에는 행정수도 이전 혹은 도시 성격에 맞는 문화, 경제 관련 일부 부처의 이전 형태로 다시 이 문제가 공론화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진성훈 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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