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窟)은 주민들의 삶을 향해 열려 있었다. 밭 언저리와 과수원 곁에도 있었고, 집 뒷마당과 이웃해 검은 입구를 드러낸 것도 있었다. 밭일 곁두리 때나, 과수원 일 틈틈이 등을 붙일 적에도 사람들은 굳이 굴을 찾았고, 아예 굴 입구에 덧문을 달고 간이 창고로 활용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천혜의 놀이터였다. 서늘하고 컴컴한 굴 속은 호기심과 모험의 별천지였고, 얼마간 친숙해진 뒤부터는 숨바꼭질 술래잡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매년 여름, 얼마나 큰 동굴박쥐를 몇 마리나 잡았느냐로 용감성의 척도를 삼는 개구쟁이들은 장대나 판자를 매고 굴을 찾았다. 그것도 어쩌면 굴과의 궂은 운명을 극복하려는 마을의 의식적인 살가움이었는지 모른다. 지난 18일, 실한 호박 잎조차 기를 못 펴고 축축 늘어졌던 이른 더위에도 굴은 섭씨 12.5도의 서늘한 그늘막을 내주며 마을 곁에 누워 있었다. 모두 여든 아홉 개 였다.마을과 굴의 편찮은 구연(舊緣)
왜 하필 일본인들이 충북 영동에, 그것도 영동읍 매천리 한 마을 야산에다 그 징글징글한 굴 파기 징용을 벌였는지 모른다. 태평양전쟁(1941∼45) 발발 직전, 대륙으로 져 나를 탄약 보관창으로 쓰려던 것이라는 설(說)이 전해지고 있고, 나라의 배꼽자리에다 소백·노령의 샅을 비집고 앉은 지리·지형적 인연으로 20여년 전 그와 흡사한 군사시설이 들어선 사실로 다만 짐작만 할 뿐이다.
해방 직전까지 이어진 그 일에 남아있던 각지의 장정들이 끌려왔고, 그 중에도 영동 군민의 수난이 가장 심했다. 옥천군 청산면에서 19살에 시집 온 김정구(78) 할머니는 당시의 참경(慘景)을 목도한, 몇 안 남은 주민 가운데 한 사람. "차수수야 근기라도 있지, 푸실푸실한 메수수밥 한 덩이 먹고 하루 종일 지게로 돌을 져 날렀지." 다이너마이트로 큰 바위를 부쉈고, 대개는 곡괭이를 대야 했다. 쇄석은 일일이 지게로 져 날라 길을 닦는 데 부렸고, 잠은 늘 한뎃잠이었다고 했다. "숱하게 다치고, 죽어나갔어. 하매 해방이 며칠만 늦었어도 장정들 다 죽었을 껴." 폭과 높이 3∼4m, 길이 30∼60m(야산을 관통하는 긴 굴도 있다고 들 했다)에 이르는 암굴은 그렇게 생겨났고, 해방 후 한참동안 주민들은 그 쪽으로 눈길 주기조차 꺼렸다고 했다.
굴과의 악연은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 경부고속도로가 나기 전까지 추풍령을 넘어 서울―부산을 잇는 1번국도(현 4번국도) 요충인 탓에 영동군에는 인민군 전략부대가 주둔했고, 주민들은 주로 굴 속으로 숨어들었다. 매천리 장 한(73) 할아버지는 "미군 삐씹구(B―29)가 떴던 날이 음력으로 52년 7월 스무이튿날" 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양정리, 산익리 할 것 없이 엄청 쏟아 붓대. 그냥 굴속에서 몰살 죽음을 당한 겨." 음력 7월 스무하룻날 제사 없는 집이 없을 정도여서 그 날은 잊을 수도 없고, 잊히지도 않는다고 했다.
새로운 인연의 끈을 찾아서
전후의 팍팍한 삶은 굴에 대한 사위스러운 느낌조차 마비시켰다. 종교인들은 기도처로 굴을 찾았고, 주민들은 농사도구를 보관하는 창고로 썼다. 눈 온 날 새벽 꿩 사냥터로도 좋았다. 사철 항온(12∼14도)을 유지하는 굴 속은 꿩이 겨울 밤을 나는 쉼터이기도 했던 터. 꿩의 수직 비상·수평 비행 속성 탓에 꿩 사냥은, 천장에 부딪쳐 고꾸라지는 녀석을 주워오면 되던 것이었다. 감자 고구마 마늘 생강 등 구근작물 저장고로 외지 상인들이 탐을 내기도 했다.
굴의 경제성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것은 90년대 중반무렵, 광천토하젓 등 굴을 이용한 식품 저장법이 알려지면서부터 였다. 99년 군은 전체 굴 가운데 군유지에 든 도리비골 굴 3개를 군비 1억4,000만원을 들여 개발했다. 안전진단을 하고 입구 바닥 천장을 정비하고 조명을 달았다. 먼저 반색을 한 것은 영동군 포도농가들이 설립한 포도주회사 '와인코리아'였다.
굴 내부 온도나 습도 광도 등이 와인 숙성 및 보관에 최적의 조건인 데다 평당 200만원이 드는 저온숙성고 건립비용은 물론, 유지·관리 비용도 거의 안 들기 때문. 와인코리아는 연 사용료 410만원에 길이 56m와 34m짜리 1·2호굴을 임대, 200㏄들이 오크통 100개와 병포도주 1만5,000병 등 총 30.5톤의 포도주를 익히고 있다. 나머지 한 곳(30m)에서도 한 식품회사와 농업기술센터가 된장 자연발효 실험 등 굴의 활용도를 따져보고 있다.
영동군은 굴 입구와 내부를 정비해 와인 시음·판매장을 세운다는 구상이다. 사업성을 따져 굴을 추가 개발, 장기적으로는 토굴(엄밀히 따지면 암굴) 숙박과 연계한 과수원 체험관광 사업도 구상중이다. 야산 너머 늘머니골짜기 일원에 조성될 '늘머니과일랜드(2006년 개관)'와의 연계 프로그램도 고려하고 있다. 군은 관내 공무원들을 견학시켜 굴 개발 및 활용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
알콩달콩 꿈 향한 조심스런 동거
산의 정령이 있어 영동군민들의 개발을 어떻게 여길 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렇게 따져 보면 일제 패망이나 6·25 피란민의 수난 역시 제 생살을 찢고 뼛속을 후벼 판 인간에 내린 정령의 노여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입김을 쐰 지 60여 년. 환경의 시각으로야 굴의 자연풍화를 인위적으로 막고 입구에 시멘트를 바르는 일이 탐탁찮을 지 모르지만, '사는 모가 팔모'라는 생존의 순리를 좇자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영동 군민들은, 이제야 제대로 머리를 얹고 굴과의 경건하고 조심스런 동거(同居)를 시작하고 있었다.
/영동=글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사진 왕태석기자
● 영농법인 "와인코리아"
영농법인 '와인코리아'는 관내 포도농민 170명이 1996년 법정자본금 1억1,000만원(현 자산 34억원)으로 설립한 토종 포도주회사다.
포도 과잉생산으로 농사 재미가 반감되기 시작하던 때. 과일나라로 칭해질 만큼 과수원이 많고, 농민의 60∼70%가 포도를 짓는 영동군이다 보니 작목 전환은 엄두를 내기 힘들었고, 해서 시작한 모험이었다.
그 해, 농민 대표와 군청 직원 등이 유럽 포도주 공장을 둘러보고 온 뒤에도 사발에 마시는 우리식 포도주나 나비넥타이 매고 폼나게 마시는 거기 포도주나 '그 똥이 그 똥'이라고 여겼다고 했다. 대형 옹기항아리 500개를 사다가 땅에 묻은 뒤 포도주를 담가 짚으로 덮었더니 술이 익었고, 직원들은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그 술은 열흘을 못버티고 초파리가 꾀더니 식초로 변질됐다.
법인 발기인이던 윤병태(45) 현 사장 등이 프랑스고 독일 등지 소규모 공장에 '위장취업', 포도주 제조공정과 감(感)을 익혔고, 충북도와 자매결연한 이탈리아 피에몬테주로부터 기술자를 소개받아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렇게 탄생한 포도주가 '샤토마니'다. 포도주와 스파클링 와인 등 11종 제품을 출시하고 있는 와인코리아는 지난 해 처음 흑자(순이익 6억원)를 냈고, 초기 출자를 꺼렸던 농가들도 증자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정관을 고쳐달라는 요구를 내놓고 있다. 회사측은 국산 최고가에도 불구하고 품질이 먹혀 들기 시작했다는 의미라고 했다. 여세를 몰아 한국와인소믈리에협회가 올 10월 코엑스에서 여는 국제와인박람회에 호스트 자격으로 참가, 샤토딸보, 샤토마고 등 20개국 160여개 회사의 포도명주들과 키를 대볼 예정이다. 윤 사장은 "질 좋은 포도, 현재의 기술력, 천혜의 저온숙성고로 덤비면 보수적인 포도주 시장에서도 승산이 있다"고 했다.
샤토마니의 '마니'는 공장이 처음 섰던 양산면 죽산리 마니산에서 딴 이름. 그는 영동군 11개 읍면 마다 각기 다른 가공용 포도를 보급하고 발효공장을 지은 뒤 본사(영동읍)의 숙성·보틀링 작업과 연계, 영동군 전체를 와인밸리화하는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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