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지음 작가정신 발행·7,500원태초부터 사랑이 있었으니 지금쯤은 사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하품이 나오는 게 옳다. 그러나 수만 년이 흘렀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그것도 하품으로 글썽이는 눈물이 아닌 진짜 눈물을.
문제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자주 흘린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여자가 있다고 믿는 남자가 있었다. 지금 사랑하는 여자와 앞으로 사랑할 여자. 한때 사랑했던 여자는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그 남자, 소설가 진우 앞에 문제의 여자 선영이가 나타났다. 뿔테 안경을 쓰고 데모한다고 쫓아다니던 옛 애인은 라식 수술을 했고 몰라볼 정도로 예뻐졌다. 그것만으로도 "오, 빌어먹을!"이라고 할 만한데 자기 친구 광수와 결혼한단다.
지나간 여자이니 여자로 보이지 말아야 하는데 이상한 일이다. 남의 아내가 될 여자를 불러내 밥을 사주고 술을 먹이고 원룸으로 끌고 가기까지 한다. 그리고는 여자의 귀에 대고 "선영아 사랑해"라고 간지럽게 속삭인다.
김연수(33)씨의 중편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소설로 쓴 '사랑학 개론'이다. 대학 동기 진우와 선영, 광수의 삼각관계를 줄기로 삼아 사랑론을 펼쳤다. 진지하고 지적인 김연수씨의 소설 세계를 기대한다면 낯설지도 모르겠다. 빠르고, 유쾌하고, 수다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식이다. "너만 보면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너는 닭고기하고 여자 중에 뭐가 더 좋냐?" "당연히 여자가 좋지, 임마." "그럼 어떻게 한 여자보다 닭고기에 대한 사랑이 더 오래 가냐? 난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눈이 녹으면 그 하얀 빛은 어디로 가는 걸까. 사랑이 지나가면 그 뜨겁고 찬란한 갈망은 어디로 가는 걸까. 어째서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닭고기보다도 짧은 걸까.
선영이도 한때는 진우를 너무너무 사랑했다. 결혼을 앞두고 원룸으로 끌려가서는 "선영아 사랑해"라는 속삭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신이 아득해져 일을 저질러 버릴 참에 진우에게 중요한 무엇이 빠져 있음을 깨닫는다. "막차버스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집에 가는 동안 뭐가 그리 즐거웠던지 한없이 웃었던 기억, 아파트 근처 벤치에 앉아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말을 멈추고 처음 입맞췄던 기억. 모든 게 끝나면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처럼 사랑했던 마음은 반품시켜야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우리에게 남는다. 기억이 없는 사람은 사랑했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 진우에게는 선영을 사랑했던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선영아 사랑해"라는 말은, 그 유명한 광고 카피와 똑같은 말은 '순 뻥이다'.
옷을 챙겨 입는 선영을 붙잡고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진짜 사랑이라곤 처음 해보는 영화'봄날은 간다'의 남자 주인공처럼 애원을 한다. 결혼은 광수하고 해도 연애는 자기하고 하자는 진우에게 "너도 소설가라고 결혼이 미친 짓인 줄 아니?"(이만교 소설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고 대꾸한다. 친구와 결혼하는 옛 애인과의 낭만적인, 혹은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랑의 결말은 그런 것이다. 어쩌면 사랑에 대한 가장 '타협적' 정의는 소설 마지막 장의 소제목일 것이다. "사랑은 어른들의 학교다." 왠일이니, 사랑이라니, 선영아.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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