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아무리 입을 꿰매도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은 터져 나오는 법이다." 1970년 당시 월간 '사상계' 편집인 김승균(金承均·39년생·현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씨의 말이다. 사상계는 70년 5월호에 시인 김지하씨의 담시(譚詩) '오적(五賊)'을 게재하면서 통권 205호를 끝으로 폐간됐다.6월 2일 당국(중앙정보부)은 '오적'을 게재해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이유(반공법 위반·반국가단체 찬양 고무 동조)로 김지하(당시 29세)씨와 사상계 편집인 김승균씨. 사장 부완혁(夫琓爀·당시 51세·전 율산그룹 회장·87년 사망)씨를 구속했다. 또 이를 전재해 배포한 신민당 당보 '민주전선'의 편집국장 김용성(金龍星)씨를 전국에 수배했다. 이른바 '사상계 필화사건'이었다. 그동안 전국의 서점에서 시판중인 '사상계'를 수거해 온 당국은 이날 새벽 1시 50분 서울 종로구 관훈동 신민당 중앙당사 1층 출판국에서 남아있던 당보와 인쇄용 옵?판 등을 압수했다.
김지하씨가 삽화와 함께 발표한 담시 '오적'은 5·16쿠데타 9주년을 맞아 사상계가 특집을 제작하면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군)장성 장·차관 등 당시 사회 지도층을 한일합방 때의 '을사5적'에 비유해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이다. 특히 김씨는 그 해 3월 17일의 '3·1고가도로 정인숙(鄭仁淑)씨 피살'을 정치적 사건으로, 4월 8일의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을 고위 공직자의 부패에서 기인한 것으로 묘사해 놓았다. 게다가 '오적'과 그들을 잡으러 갔던 '포도대장'이 결탁해 '오적'을 고변한 힘없는 백성을 잡아 가두었으며, 결국 '오적'과 '포도대장'은 대명천지에 날벼락을 맞아 죽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김씨가 처음 시도한 담시는 일반 서정시보다 길고 단편보다 짧은 독특한 형태로 판소리의 운율을 갖고 있다. '오적'은 200자 원고지 40여매 분량으로 '사상계' 18페이지에 걸쳐 게재됐다.
사상계는 52년 8월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원장 백낙준)'의 기관지 '사상'이 그 모태. 통권 4호를 발행했던 '사상'의 편집인을 맡고 있던 장준하(張俊河·7대 국회의원·1915∼1975)씨가 53년 4월 이를 인수, '사상계'라는 월간종합교양지를 창간했다. 67년 장씨가 정계에 진출하면서 언론인 출신의 부완혁씨가 경영을 인수했다.
사상계 폐간과 관련 김승균씨의 설명. "중정은 사상계를 없애기로 하고 감좆?있는 부 사장에게 사인을 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부 사장은 '장준하가 주인이니 그의 허락 없이는 안된다'며 버텼다. 하루는 중정 과장이 장의원과 함께 와서 부 사장에게 사인을 부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에게 떠넘기며 결국 사인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정보부가 부 사장에게 3,000만원을 주고 소유권을 가져가는 것으로 타협이 됐다. 9월에 출소하니 사상계가 모 신문사로 팔려가게 되어 있었다. 그 신문사에 가보니 우리가 갖고 있던 철제 간판을 현관에 떡 붙여 놓았더라. 부 사장은 '사형 당하는 것보다 안락사 시키는 게 낫겠다'며 3,000만원을 받지 않았고, 계속 휴간하다 자동 폐간됐다. 나중에 부 사장이 수년간 법정 투쟁 끝에 살려냈으나 책을 내지는 못했다. 부 사장은 율산그룹 회장을 지낼 때 그 철제 간판을 회장실에 붙여 놓았을 만큼 애착이 컸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朴統 처음엔 모른척… 野당보에 실려 파문"/김승균 당시 사상계 편집인
사상계는 매달 테마를 정해 간행하고 있었다. 3월호는 3·1운동, 4월호는 4·19, 5월호는 5·16, 6월호는 6·25 등이었다. 당시 사무실은 종로구 청진동 백조다방 건물 4층에 있었다. 야당 정치인이나 지식인 등의 사랑방 역할도 했다. 그들 중 신민당 재정위원장인 2선 의원 김세영(金洗榮·83)씨가 있었다. 김씨는 명륜동 자신의 집에 우리를 초대해 마작으로 돈을 잃어주며 '자금지원'을 해주곤 했다. 그런 자리에선 세상에 대한 비판적 이야기가 오고갔다. "동빙고동(서울 용산구)에 고관대작의 집들이 으리으리하다. 군부도 썩을대로 썩었다"는 대화가 많았다. 당시 동빙고동은 '을사 5적'에 빗대어 '오적촌'으로 불렸다.
1970년 4월 중순이었다. 편집회의에서 5·16쿠테타 특집으로 '오적촌'을 다루자고 했더니 모두가 찬성했다. 필자는 자연스럽게 김지하씨로 모아졌다. 당시 김씨는 '정식 시인'으로 등단은 않았지만 그의 서정성과 사회비판 의지는 6·3사태 이후 정평이 나 있었다. 특히 그러한 글을 잡지에 게재하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김씨가 최고의 적임자였다.
김씨를 만나 부탁했더니 흔쾌히 승낙하고 며칠 뒤 '담시 오적'이란 제목으로 삽화까지 그려 왔더라. 걱정도 없지 않았다. 내가 전과 2범(민통학련 성균관대 위원장으로 5·16 직후 구속, 6·3사태 때 불꽃회 사건으로 구속)이기도 했지만, 광고탄압 등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회사에 누를 끼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사장실 책상 위에 원고를 슬그머니 올려놓고 점심 먹으러 나갔다. 돌아와 보니 부완혁 사장이 껄껄 웃어가며 재미있게 읽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괜찮겠죠"하면서 원고에 OK 사인을 해 주었다. 어려운 한자가 많아 활자를 만드느라 편집이 늦어져 4월 말에야 출간됐다. 책은 날개돋힌듯 팔렸으며, 우리는 '대어를 낚았다'고 즐거워했다. 당국에서도 별 반응이 없었다.
5월 중순 어느날 국회에서 신민당 김모 의원이 정부를 비판하며 '오적'을 낭독하는 일이 있었다.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상계 잡지를 가져오라 해서 읽고는 "이게 애국이야"하며 집어 던졌다. 옆에 있던 김계원 중앙정보부장이 "모르는 척 하는게 좋겠습니다. 크게 벌리면 상황이 더 나빠질 것입니다"고 만류했고, 박 대통령도 수긍했다. 문제는 다른데서 터졌다. 민주당 김세영 재정위원장은 당보 '민주전선'도 관리하고 있었는데 '오적'을 당보에 게재해 평소의 2배인 20만부(6월1일자·제40호)를 찍어 배포했다. 당시 '민주전선'에는 오적 가운데 군장성 대목은 빼버려 사실상 '사적(四賊)'이 돼버렸지만.
박 대통령이 책을 집어 던진 직후 김지하씨는 당국에 끌려가 1주일 정도 간단한 조사를 받았다. 이후 김씨는 여관에 머물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그를 서울대 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했다. 6월 2일이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니 중정 요원들이 사무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사실로 끌려가 불문곡직하고 30분 정도 두들겨 맞았다. "김지하를 어디다 숨겼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으나 조금 전 병원에서 받아온 환자보호증이 마음에 걸렸다. "뒤가 급하다"며 화장실에 가서 침을 잔뜩 발라 삼켜버렸다. 다시 조사실로 왔더니 그들은 "김지하 잡아다 놓았다"고 말했다. 물론 부 사장도 잡혀왔다.
당시 중정 조사관들은 나와 부 사장, 김지하씨, '민주전선' 편집국장 김용성씨, 신민당 총재 유진산(柳珍山)씨를 거꾸로 '오적'이라 불렀다. 9월 중순 모 판사가 나를 불러 "몸이 많이 아프지요"라고 묻더니 보석금 20만원을 내고 나가라고 했다. 신민당에서 그 돈을 대신 내 주었다.
■담시(譚詩) 오적(五賊)/요약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겄다/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하고 목질기기가 동탁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의 소굴이렷다/사람마다 뱃속이 오장육보로 되었으되 이놈들의 배 안에는 큰 황소불알 만한 도둑보가 겉붙어 오장칠보/
…하루는 다섯놈이 모여/ 도(盜)자 한자 크게 써 걸어놓고 도둑시합을 벌이는데/지마다 골프채 하나씩 비껴들고 꼰아잡고/
…첫째 도둑 나온다 재벌이란 놈 나온다/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초치고 간장치고 계자치고 고추장치고/온갖 특혜 좋은 이권은 모조리 꿀꺽/귀띔에 정보 얻고 수의계약 낙찰시켜 헐값에 땅 샀다가 길 뚫리면 한몫 잡고/천원 공사 오원에 쓱싹, 노동자 임금은 언제나 외상외상/
…또 한놈 나온다 국회의원 나온다/구악(舊惡)은 신악(新惡)으로/부정축재는 축재부정으로/모든집은 와우(臥牛)식으로/정인숙을 철두철미하게 본받아랏/치자즉도자(治者卽盜者)요 공약즉공약(公約卽空約)이니 우매(遇昧)국민 그리알고/
…셋째놈이 나온다 고급공무원 나온다/이빨 꼴이 가관이다/단것 너무 처먹어서 새까맣게 썩었구나/한 손으로 노땡큐요 다른 손은 땡큐땡큐/되는 것도 절대 안돼, 안될 것도 문제 없어/책상 위엔 서류뭉치, 책상 밑엔 지폐뭉치/높은놈껜 삽살개요 아랫놈껜 사냥개라/
…넷째놈이 나온다 장성 놈이 나온다/쫄병들 줄 쌀가마니 모래가득 채워놓고 쌀은 빼다 팔아먹고, 쫄병 먹일 소돼지는 털한개씩 나눠주고 살은 혼자 몽창먹고/엄동설한 막사 없어 얼어죽는 쫄병들을/일만하면 땀이 난다 온종일 사역시켜/막사 지을 재목 갖다 제집 크게 지어놓고/
…마지막놈 나온다 장차관이 나온다/굶더라도 수출이닷, 안팔려도 증산이닷/아사(餓死)한 놈 뼉다귀로 현해탄에 다리놓아 가미사마 배알하잣!/예산에서 몽땅 먹고 입찰에서 왕창 먹고/켄트를 피워물고 외래품 철저단속/
…추문듣고 뒤쫓아온 말잘하는 반벙어리 신문기자 앞에 놓고/자네 핸디 몇이더라?/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나라 망신 시키는 오적을 잡아들여라/당장에 잡아 대령하겠나이다/전라도 갯땅쇠 꾀수놈이 발발/네놈이 오적이지/애고 애고 난 아니요, 농사로는 배고파서 돈벌라고 서울 왔소/이리바짝 저리죄고 위로 틀고 아래로 따닥 찜질 매질 물질 불질 무두질에 당근질에 비행기태워 공중잡이/오적은 무엇이며 어디있나 말만하면 네 목숨은 살려주마/다섯 짐승, 시방 동빙고동에서 도둑시합 열고 있오/
…남산을 훌렁넘어 한강물 바라보니 동빙고동 예로구나/생김생김은 짐승이로되 호화찬란한 짐승이라/포도대장 깜짝 놀라 사면을 살펴보는데/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이게 어느 천국이냐/여대생 식모두고 경제학박사 회계두고/가정교사는 철학박사 비서는 정치학박사/잔디 행여 죽을세라 잔디에다 스팀넣고/새들 행여 죽을세라 새장속에 히터넣고/온갖 음식 살펴보니 침 꼴깍 넘어가는 소리 천지가 진동한다/
…포도대장 침을 질질질질질질 흘려싸면서 가로되/이럴 줄을 알았더면 나도 일찌감치 도둑이나 되었을 걸/한놈이 쓰윽 다가와 써억 술잔을 권한다/포도대장 뛰어나가 꾀수놈 나꿔채어 오라묶어 세운 뒤에/요놈, 네놈을 무고죄로 입건한다/오적은 뒤에 포도대장 불러다가 그 용기를 어여삐 여겨 저희 집 솟을대문 바로 그 곁에 있는 개집속에 살며 도둑을 지키라하매 포도대장 이말듣고 얼시구 좋아라/
…어느 맑게 개인날 아침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다 갑자기 벼락을 맞아 급살하니 이때 또한 오적도 육공(六孔)으로 피를 토하며 꺼꾸러졌다는 이야기.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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