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괴롭힘'(왕따)으로 불리는 사건이 최초로 언제 법정에 서게 됐는지는 '다수에 의한 괴롭힘'의 기원이 언제부터인지를 가늠하는 것 만큼 어렵다. 왕따 소송이 주목을 받은 것은 1990년대 후반 학내 및 직장내 왕따가 사회문제화한 이후였다. 법조계에서는 "이전에도 비슷한 소송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 '왕따'라는 말이 있기 전의 '왕따 소송'까지 통계화 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법원은 '왕따 소송'이 의제화한 지 10여 년이 채 안된 올해 "대인기피증 등 왕따 피해자가 가지고 있는 기질은 책임을 물을 것이 아니라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고 판시, 약자 편에 서는 진일보한 판례를 만들어 냈다.3월말 대전고법은 99년 왕따 후유증으로 고교를 자퇴한 이모 군의 부모가 대전시와 가해 학생 가족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2002나5345)에서 "이군에게도 30%의 책임이 있다"고 한 1심을 깨고 "이군 부모에게 보호 소홀에 대한 책임 20%, 가해자에게 80%의 책임이 있을 뿐 이군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 가해자의 손해배상 책임을 확대하고 '이러 이러한 이유로 원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식의 추상적인 피해 공제를 지양하는 쪽으로 물꼬를 바꿔놓은 판례였다. 최근까지도 법원은 '지능이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낮고,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하고,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성적이 부진하고 주위가 산만하다'는 등의 피해학생의 '무해'한 기질까지도 왕따를 유발한 책임 및 과실로 인정했었다.
이보다 앞서 내려진 대표적인 왕따 소송은 95년 "심장병 때문에 특별대우를 받는다"는 이유로 급우들로부터 집단 폭행과 괴롭힘을 당해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해외이민까지 떠나야 했던 서울 Y고의 왕따 사건. 96년 첫 소송이 제기된 이 사건은 수년 간 왕따 가해 학생에 대한 형사처벌, 학교 당국·교육청 및 지자체 등에 대한 배상 책임 인정, 나아가 교육청의 가해 학생 측에 대한 구상권 인정 등 왕따와 관련된 수 많은 첫 판례를 만들었다.
왕따 사건은 그러나 그 피해 정도와 학교·교사의 방치 여부, 피해자 부모의 대처 여부 등에 따라 피해액 산정과 책임 유무가 달라지기 때문에 결과에 일률적인 잣대를 들이 대는 것은 위험하다. 왕따 소송에서 배상액은 정신·신체 질환의 정도에 따라 정상인의 경우 인정되는 '일실수입'(도시일용노임 기준)을 기본액으로 치료비· 피해자의 과실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이 때문에 확실한 승소를 위해서는 피해 학생의 일기장이나 주변의 증언, 정신·신체질환 감정 등 왕따의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실제 2001년 자녀의 초등학교 담임교사와 서울시를 상대로 제기된 왕따 피해 소송에서 법원은 "원고에게 실제 집단 괴롭힘이 발생했는 지 입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원고패소 판결했다. 당시 피해 학생은 왕따로 대인 공포증 등 정신분열 증상을 갖게 됐다고 주장했으나 왕따와 정신분열 사이의 인과관계가 증명되지 않은 것도 패소의 한 원인이었다.
학내 왕따 뿐만 아니라 직장 내 왕따, 군대 내 왕따, 심지어 업계 내 왕따 등 갈수록 다양해 지고 있는 왕따 소송에서도 이 같은 기준은 그대로 적용되며, 피해가 입증되는 한 배상책임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추세다. 2000년 부서내 비리를 사내 감사실에 제보했다는 이유로 왕따와 해고를 당한 정모씨 사건에 대해 법원은 산업재해를 인정했다.
또 지난 해 서울고법은 '특별히 악의적인 가혹행위'가 없었던 군대내 왕따로 인한 자살사건에 대해서도 1심을 깨고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염두에 둘 것은 군대 내 왕따 사건은 정신이상 등을 유발한 경우 국가유공자 판정을 받을 수 있지만, 자살할 경우에는 '자살자는 제외한다'는 규정 때문에 국가유공자 판정 소송에서 거의 패소한다는 점이다.
한편 서울지법 동부지원은 2001년 다른 중개업자들이 담합해 정보 공유를 제한 하는 방법 등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한 중개업자의 '업계 왕따 소송(2001가단1264)에서 원고승소 판결했다. 법원은 "부동산 공동중개에 있어 원고를 소위 '왕따' 시킨 공동 불법행위는 사회질서에 반한다"는 이유로 위자료 지급의 당위성을 인정했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 집단괴롭힘 소송 변호사
왕따 소송은 다른 소송보다 변호사의 섬세한 접근이 필요한 분야다. 일반 손해배상 소송의 원리에 충실하기 때문에 별도의 법리적 '논리'는 필요치 않지만, 관련자들의 상처와 분노를 제어하기가 만만치 않다. 소송 결과가 피해·가해자 모두에게 또 다른 앙금과 좌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변호사들로서는 부담이다.
왕따 소송에서 대표적인 판례를 끌어낸 변호사로 우선 손난주 변호사를 꼽을 수 있다. 손 변호사는 대전고법의 피해자 책임면제 판례를 이끌어냈고, 이명숙 변호사는 96년 Y고교의 왕따 소송을 맡아 여러 판례를 만들어 냈다. 이 변호사는 "가해자측 변호사가 좀 더 합의에 중점을 뒀더라면 원만히 해결됐을 사건이었다"고 아쉬워했다. 학내 왕따 소송은 소송 제기 전에 교사 등의 힘을 빌려 가해 학생의 진술 등을 받아놓는 작업이 중요하다. 소송을 낸 뒤 입증을 하려면 가해자들이 강경하게 돌아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직장 내 왕따 소송 분야는 노동 전문 변호사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법무법인 한울의 대표 변호사인 이경우 변호사는 LG전자 사건을 맡아 직장 내 왕따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진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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