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응(26·뉴욕 메츠)이 마운드에 설 때마다 왼쪽 손목에 염주를 찬다는 것은 이제 뉴욕 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염주에 들어붙어 있는 눈물과 땀의 농도를 느낄 수 있는 팬들은 얼마나 될까.4년 전인 1999년 5월 서재응은 미 LA 센트럴병원의 수술대 위에 초조한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끊어진 오른쪽 팔꿈치 인대를 잇기 위해 왼쪽 인대를 떼다가 이식하는 대수술이었다. 선수생명의 갈림길 위에 드러누워 있었던 셈이다. 온몸에 마취기운이 퍼져가는 사이 서재응에 눈빛에는 온갖 번뇌가 108개 염주알처럼 줄줄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광주일고 시절 1년 후배인 김병현(24·보스턴 레드삭스)과 함께 청소년국가대표를 지냈던 서재응은 97년 7월 인하대 2학년 때 야구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LA에서 벌어진 한미 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의 호투를 지켜본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로부터 입단 제의가 잇따랐던 것. 그로부터 5개월 뒤 서재응은 뉴욕 메츠의 135만달러짜리 유니폼을 입었다.
출발은 좋았다. 서재응은 이듬해 스프링캠프에서 LA다저스와의 시범경기에서 5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며 차세대 에이스로 주목을 받았다. 또 그해 방콕아시안게임에 출전, 2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딸 때만해도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인생사 새옹지마.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돌이켜보면 입단 신체검사에서 발견된 오른쪽 팔꿈치 인대 이상을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고통을 외면하면서 이를 악물고 던지는 사이 서재응의 인대는 갈갈이 찢겨지고 있었다.
병원 문을 나서는 그를 맞이한 것은 절망이었다. 기약없는 재활의 길이었다. 다시 공을 잡기까지 꼬박 1년. 아무리 온 힘을 다해 던져도 150㎞를 웃돌던 강속구가 되살아나지는 않았다. 제구력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었다. 밤을 새워 공을 던지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 못지 않게 서재응을 괴롭힌 것은 고독이었다. 유난히 서재응을 총애했던 바비 발렌타인 감독은 성적부진으로 팀을 떠났고, 청운의 꿈을 안고 함께 태평양을 건넜던 형 서재환도 팀에서 방출된 뒤 한국으로 돌아갔다. 메츠의 새로운 희망이라며 부추기던 매스컴과 팬들의 관심도 점점 멀어져갔다.
그러던 그에게 염주는 유일한 벗이었다. 혼자 남겨진 어두운 방에서 불교신자인 어머니가 전남 해남 대흥사에서 만들어 전해준 염주알을 넘길 때마다 그는 마음의 평정을 찾으며 부활의 의지를 되살렸다.
참고 기다리는 자에게 희망은 열리게 마련이다. 2년여 동안 뼈를 깎는 재활훈련 끝에 컨디션을 회복한 서재응은 2001년 7월 마이너리그 올스타전에 참가해 성공적인 재기를 알렸다. 서재응은 지난해 7월22일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 깜짝 데뷔전까지 치렀다.
그러나 서재응은 여전히 마이너리거였다. 페드로 아스타시오의 부상으로 마이너리그 6년만에 올 시즌 처음으로 선발진에 합류할 때만 해도 그에게는 '임시선발' 딱지가 붙어 있었다. 한 게임만 삐긋하면 언제든 짐을 싸야 할 처지였다.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뉴요커들은 50㎝ 폭의 홈플레이트의 끝선을 절묘하게 파고드는 서재응의 컨트롤 아트에 매료돼 있다. 특히 좌절을 딛고 일어선 그의 휴먼스토리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 아름다운 투수 서재응, 그는 이제 당당한 메이저리거다.
/김병주기자 bj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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