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이 지나갈 무렵 내가 사는 집의 뜨락에 모란이 피기 시작했다. 모란이 피는 것을 보면서 나는 벌써 모란이 지는 것을 노래하던 김영랑의 시를 생각하고 있었다. 유월이 되고 그 찬란하던 모란이 지기 시작하면서 김영랑의 오후와 나의 오후는 시간의 경계를 지우면서 하나가 되었다. 떨어지는 꽃 앞에서 나는 오래 전에 이 지상을 떠난 시인을 이국에서 보내는 내 오후로 불러 낸 것이다. 김영랑의 시를 배우던 무렵, 나는 그 꽃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다만 김영랑의 시만이 아름다웠다. 그 시를 어우르고 있던 슬픔의 빛은 김영랑이라는 시인의 개인사를 어떤 신화로 올려놓고 있다. 그 슬픔은 어떤 깊이를 하고 있기에 시간을 지우며 시인의 오월과 뜨락과 꽃, 아득한 빛에 가물거리는 그 시대를 신화로 만드는가. 신화의 세계라는 것은 사실은 과장된 초인간적 공간이다. 신화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가 금기하거나 꿈꾸거나 하는 것을 아우른다. 신화의 세계에는 인간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타협이 없다. 초인간적 신화의 공간은 인간의 시간이 좌절되는 순간 피어 오른다. 신화의 시간은 좌절된 인간의 시간을 보듬어서 어루만진다. 그리고 다른 운명의 길을 보여준다. 그 운명의 길을 갈 수 있는 인간은 이미 자신의 운명을 마친 인간이다.1970년대 내가 아직 아이였을 무렵, 내가 자라던 내 고향 진주는 세상의 바람으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긴급조치 바람, 공단지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 세계정치를 뒤덮고 있던 냉전바람 등의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막아내고 있었다. 고향은 아직 나의 어머니였다. 학교에서 한 달에 한 번씩 하던 민방위 훈련이나 반공 수업, 중학생이 되면서 견뎌내야 했던 교련수업이니 행군이니 하는 것들은 귀찮은 의무였을 뿐, 아무런 정치적 외피를 입지 않고 내 언저리를 어정거리고 있었을 뿐이다. 고향의 강변에는 대나무들이 검푸른 울을 만들었고 작은 야산에서는 복숭아니 능금이니 하는 것들이 잔뜩 자라고 있었다. 아버지의 직장이었던 작은 농대에서는 해마다 가을축제를 열어, 그 축제가 있는 날이면 아버지는 좋은 찹쌀로 만든 커다란 떡이나 축산학과에서 기르던 소를 잡아 나눈 질 좋은 고기를 들고 오시기도 했다. 태풍이 와서 잔뜩 기다리던 추석상을 휩쓸어 가도, 홍수가 나서 근처 보통학교 강당으로 피난을 가도, 아직 나의 존재는 즐거운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80년대였다. 나는 고향에서 대학을 다니기 시작했다. 갑자기 아이인 내 존재는 우산 없이 검은 비를 맞는 것 같았다. 벗들은 감금되고 이곳 저곳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고향을 떠나가고 갑자기 사라지기도 했다. 입을 열어 말을 하면 누군가가 입을 막았다. 글을 쓰기 위해 펜을 잡으면 내 머리에서 사는 나 아닌 그 누군가가 내 펜을 잡았다. 고향의 산동네에서 있던 벗의 자취방에 갑자기 경찰들이 찾아오고 (그 해도 복숭아와 능금은 그렇게 탐스럽게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벗들은 패가 갈렸다 (작은 농대는 종합대학이 되어 있었고 작은 농대 시절에 열던 축제를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 귀가 시간을 단속했다. 불온한 책을 읽고 학습하는 학생조직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경찰에 잠시 끌려가서 취조를 받던 그 무렵 내 속에서 뛰어다니던 즐거운 존재는 나를 떠나고 있었다.
80년대 후반에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왔다. 여의도라는 작은 섬에 있는 큰 회사에서 밥을 벌기 시작했다. 큰 회사에서 밥을 버는 일은 쉽지 않았으나 나는 밥을 벌어야 했으므로 터벅터벅 그곳으로 가서 엎드려 일을 하고 작은 지하 자취방으로 돌아 왔다. 밥을 버는 시간은 나를 어른으로 만들었다. 서울이라는 곳에는 큰 강이 있었는데 (내 고향에도 강이 있다. 많은 고대 유적지들이 강가에 있는 것처럼. 언뜻언뜻 고대유적지에서 말라 비틀어진 옛 강줄기를 더듬을 때마다 강가에 자리잡은 고향과 서울이 생각난다) 그 강가에 서서 큰 회사를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그 회사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부나비 같은 꿈에 매달린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 막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한 코미디언도 있었고(그는 출연료보다 열 배는 비싼 정장을 입었다), 가녀린 옷을 입고 스튜디오 앞에서 피곤한 얼굴로 출연을 기다리던 어린 아가씨도 있었고(그녀의 매니저는 이제 막 나온 CD를 들고 이곳 저곳 스튜디오를 기웃거렸다), 회사 앞에는 학교를 빼먹고 잘생긴 가수를 보기 위해 밤을 새우던 아이들도 있었다. 아나운서를 사랑하던 중년의 여인은 매일 저녁뉴스가 끝나는 시간이면 회사 앞에 서서 아나운서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그 여인의 아이들의 저녁밥은 누가 차려줄까 하고 나는 늘 생각했다).
90년대 초반 나는 서울을 떠났다. 독일이라는 낯선 나라의 학생 기숙사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십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그 세월 동안 낯선 나라 대학에서 낯선 나라 말로 강의를 듣고, 리포트를 쓰면서 지냈다. 꿈으로 내가 지나온 자리들이 나타나곤 했다. 그 곳들. 내가 자라고 어른이 되면서 지나왔던 자리들과 사람들이 꿈 속에서는 아주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나곤 했다. 고향의 과수밭의 능금나무에는 권총들이 주렁주렁 열렸다. 내가 능금을 따기 위해서 그 과수밭에 들어섰을 때 권총들은 나를 향해 불을 뿜었다. 일어나 보면 꿈이었다. 그때 창원으로 갔던 벗들도 꿈에 나타났다. 우리가 자주 갔던 막걸리집이었다. 그 집에서 벗들은 아직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벌써 십년째 그 자리에 앉아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시위대가 점거하고 있던 거리도 꿈 속에 나타나곤 했다. 시위대가 앉아있던 자리 위에 커다란 독수리가 빙빙거리고 있었다. 마치 병아리를 채어가려는 솔개처럼. 누군가 독수리를 향해 빈 병을 집어 던졌다. 빈 병 속에서 커다란 컴퓨터게임이 액정처럼 흘러나왔다. 게임은 시위대를 집어 삼켰다.
꿈에서 깨어나면 혼자 기숙사 방이었다. 일어나서 불을 켜고 컴퓨터를 켰다. 무언가 쓰고 싶었다. 가슴 속에 무언가가 고이고 있었다. 그러나 한 줄도 쓸 수가 없어 멍하니 깜박이는 커서를 지켜보고 있었다.
삼십대를 지나오면서 자신이 지닌 가치의 순결만을 고집하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이라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게 되고 타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되면서 서서히 역사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잊을 수 있는, 혹은 잊어버릴 수 없는 당대의 역사에서부터 인간이 문자라는 것을 발명해서는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쓸 수 있게 된 그 오랜 역사까지 들여다보는 행운을 가지면서 나는 정작 많은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문학을 시작할 무렵 나는 아주 할 말이 많았다. 그런데 시인이 된 지 거의 이십 년이 되어가는 요즈음 나는 할 말이 없다. 이미 지나와서 없어진 시간들이 내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 까닭인가. 물리적인 흐름에서는 이미 소멸되어 버린 시간들이 내 안에서는 아직 살아남아 부비적거리고 있다. 컴퓨터를 마주하고 있는 그 순간, 오래된 시간들은 내 속에서 새로 태어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된다.
그 순간이면 나도 덩달아 정말 그 시간들을 살아 움직이게 하고 싶었다. 다시 일으켜 다른 운명의 길을 가게 하고 싶었다. 70년대의 즐거운 아이는 어디로 갔는가, 그 젊디 젊은 벗들은 지금 왜 이 지상에 없는가, 그 때 출연료보다 열 배는 비싼 정장을 입고 여의도를 어슬렁거리던 그 코미디언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그들에게 나는 다른 시간을 살아가게 하고 싶다. 내가 쓰는 글이라는 공간 속에서 나는 그들의 작은 시간들을 신화의 시간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 좌절된 인간의 시간들을 불러서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그것이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이다. '문학을 하는 이유'와 내가 서로 불화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 연보
1964년 경남 진주 출생 1987년 경상대 국문과 졸업·계간 '실천문학'에 시 '땡볕' 등 4편 발표 등단 1992년∼현재 독일 체류, 뮌스터대 고고학 연구원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장편소설 '모래도시' 산문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등 동서문학상(2001)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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