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사를 간략히 소개해달라'는 말에 한국휴렛팩커드(HP)의 최준근(50·사진) 사장은 선승의 화두 같은 문자 하나를 내던졌다. 매출면에서 국내 수위권의 외국기업이고, 세계적으로는 IBM과 함께 기술과 전통을 자랑하는 거대 정보기술(IT) 기업이 HP다. 그런데 어떻게 수학기호 하나로 그 모두를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 회사가 만드는 제품과 서비스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인가에 덧붙여(+)져야만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들이죠. 세상에 나와 유용하게 쓰여 보탬(+)이 되기를 바라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자는 것이 HP의 철학입니다." 어찌 보면 모든 기업들이 표방하면서도 쉽게 이루지 못하는 철학적인 가치다. 어려운 말로 한껏 치장할 수 있는 거창한 내용이지만 최 사장은 수수한 말 몇 마디로 쉽게 표현한다.주변을 둘러 보면 그가 연 1조6,0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글로벌 기업의 수장이라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는다.
22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은 칸막이조차 제대로 없는 '열린 공간'으로 유명하다. '직원들과의 활발한 의사소통을 위한 장치'라는 설명이 없더라도 소탈한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음료수나 커피도 사내 곳곳에 놓인 커피대에서 손수 해결한다. 비서는 있지만 비서실은 없고, 잦은 해외 출장에도 자기 가방은 직접 챙겨 다닌다. 최고경영자(CEO)들이 으레 그렇듯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지만 남에게 의존하는 법이 드물다.
"괜히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할 필요가 있나요. 어지간하면 알아서 해야죠."
이런 행동양식은 그가 강조하는 'HP방식'(HP way)의 실천이라는 것이 주변의 말이다. 흔히 대기업이 겪기 쉬운 관료적인 타성, 개인에 대한 조직의 불신을 떨쳐내고 신뢰에 기반한 인간관계로 회사를 이끌어간다는 것.
직원들의 복지 및 수평적인 관계를 강조하고 직원과 조직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설명이다. 최 사장은 "한국HP의 모든 사업장이 같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지난 20년간 이런 목표 아래 전직원이 노력해가는 과정에서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직장생활을 삼성전자에서 시작했다. 입사 10년차가 될 즈음인 1985년 합작으로 생긴 '삼성HP'로 옮겨 앉은 것이 20년에 걸친 인연의 시작이다. 한국HP 역사의 산 증인인 셈이다. 당시 삼성전자의 사업부 수준으로 시작했던 사업이 단 한 해도 쉬지 않고 가쁜 성장을 거듭, 이제 2조원을 바라보는 거대 기업이 됐다.
한국HP는 지난해 이맘때 창사이래 최대 '거사'를 치뤘다. 업계의 앙숙이자 최대 경쟁자였던 컴팩코리아와 합병한 것. 지난해 초 24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HP와 컴팩 본사간 합병의 후속 조치였다. 각각 기업 시장과 소비자 시장에서 강세를 보여온 두 기업의 합병은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합병'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상당한 상승효과(시너지)를 불러일으켜 정체에 빠진 정보기술(IT)업계에 대격변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한국 땅에서는 비관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특히 창조성과 조직을 동시에 강조하는 한국HP의 문화와 파격적일 만큼 개인의 능력과 리더십을 중시하는 컴팩코리아의 문화는 서로 어울리기 어렵다는 지적들이 합병 기업의 수장이 된 최 사장의 어깨를 짓눌렀다.
한때 이런 우려를 입증이라도 하듯 컴팩 출신의 임원들이 여럿 자리를 옮기는 일도 있었다.
1년이 지난 지금, 한국HP는 매출과 생산성, 시장 점유율 면에서 괄목상대할 성과를 올리고 있다. 매출은 2조원 대를 내다보고 있으며 극심한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PC와 노트북 시장에서 성장률 수위를 기록 중이다.
수치만으로도 합병은 성공적이었다는 평이다. 최 사장은 "합병을 통해 한국HP와 컴팩은 오랜 때를 벗겨내고 새 회사로 태어났다"고 덧붙인다. 그는 회사를 떠난 사람들마저 "한국HP를 친정으로 여겨주는 든든한 우군"이라고 말했다.
최 사장은 "HP는 글로벌 기업이지만 한국HP는 한국 기업"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해외에서 들여오는 것보다 밖으로 내보내는 재화가 수 조원이 많은 '수출 흑자 기업'이라는 설명이다. 주요 부서를 맡고 있는 임원들 뿐만 아니라 1,300여명의 직원 중 몇 명을 제외한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 점도 20여년의 세월동안 이미 토착화한 한국HP의 모습이다.
앞으로 전세계 HP그룹 내에서 한국HP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HP의 연구개발(R&D)센터를 국내에 유치하기 위한 노력도 그 일환이다. 최 사장은 "실리콘밸리에서 태어난 HP가 세계 최고의 IT기업으로 거듭나는 모태는 한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철환 기자 plomat@hk.co.kr
● 최준근 사장은 누구
▲ 1953년 경상남도 거창 출생
▲ 1971년 진주고등학교 졸업
▲ 1975년 삼성그룹 공채 입사
▲ 1976년 부산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
▲ 1982년 HP 소프트웨어연구소 근무
▲ 1990년 삼성HP(주) 고객지원본부장 이사
▲ 1995년 한국HP 대표이사 사장
▲ 1998년 미국 하버드대학 최고경영자 과정
▲ 2003년 한국리눅스협의회 회장
나의 경영관
개인적으로 경영철학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마다 난감해진다. 인생이나 경영에 대한 분명한 철학을 내세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직업적 사명감을 대신해 철학이라고 내세울만한 것이 있다면 두 가지 정도를 언급하고 싶다. 첫째는 우리 회사가 내세우는 'HP방식'(HP Way)인데, 굳이 특정회사의 경영철학이라고 일컫지 않아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다. 직원간의 신뢰, 존경, 고결함, 솔직한 대화, 창조성, 그리고 헌신 등이 주된 내용이다.
나는 HP처럼 기술을 중시하는 회사에서 모든 사회와 조직에 적용 가능한 보편적 가치들을 중시한다는 데 만족감을 느낀다. 어디서나 성공적인 집단, 성공적인 개인이 되기 위한 원리는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기술에 대한 맹목적 추구 속에서 인간과 사회의 가치가 약화하는 오늘의 세계적 현실을 보면 더욱 그렇다. 또 하나 내가 직원들과 나 자신에게 항상 강조하는 덕목이 있다. '내가 있던 자리를 깨끗이 하자'는 것이다. 내가 앉은 자리의 청소를 깨끗이 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회사에서 맡고 있는 직책에서 일을 투명하고 깔끔하게 하자는 뜻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내 후임으로 오더라도 내가 벌여놓은 일의 뒤치닥꺼리를 하거나 나쁜 선례로 인해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창조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길을 닦아놓자는 것이다.
■ 한국HP는 어떤 회사
한국HP는 IBM과 더불어 세계 최대의 종합 컴퓨터 기업인 미국 HP사의 자회사다. 1977년 삼성전자내 'HP사업부'로 국내에 첫 발을 내디뎠으며, 84년 삼성전자에서 독립, HP와 삼성전자가 각각 55%와 45%의 지분을 출자한 합작 법인이 됐다.
95년 회사명을 현재의 '한국HP'로 변경했고, 98년에 삼성전자의 지분 45%를 모두 인수하면서 순수 HP 자회사로 거듭났다. 당시 첫 사장으로 최준근씨가 임명된 이래 9년째 연임하고 있다.
99년에는 계측기 사업본부가 한국 에질런트 테크놀러지로 분사했고 지난해에는 본사간의 합병에 의해 컴팩코리아와 합병했다.
한국HP는 크게 4개 분야의 사업을 펼치고 있다. 조직도 4개로 나뉘어져 있다.
각종 서버 및 기업용 IT제품은 엔터프라이징 시스템 그룹(ESG)이, PC와 개인휴대단말기(PDA) 등은 퍼스널 시스템 그룹(PSG)이 담당하고 있으며, 컨설팅 및 교육 분야는 HP서비스(HPS)가, 프린터와 디지털 카메라 등은 이미징 앤 프린팅 그룹(IPG)이 맡고 있다.
임직원은 총 1,300명이며, 지난해 1조6,000억원의 매출을 올려 국내 외국계 IT기업중 1위를 차지했다. 외국계 기업으로는 특이하게 수출이 많다.
지난해 전체 수출과 중계무역규모는 총 4조원으로, 매출의 두 배 이상이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PC, 모니터, 메모리,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등 IT제품들을 HP본사와 다른 해외 지사에 판매한 액수다.
HP본사는 193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실리콘밸리에서 설립됐으며, 현재 같은 지역의 팔로알토에 본사를 두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최고경영자(CEO)로 꼽히는 칼리 피오리나가 회장이며, 지난해 84조원(700억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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