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는 문화적 패권과 다양성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에 휩싸여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문화전쟁이 진행중이다. 문화가 자유무역의 대상이 되면서 미국은 어느덧 세계 영화시장의 85%, TV 프로그램 수출량의 75%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사회는 2001년 1월 유네스코 31차 총회에서 각국의 문화주권을 지키고 세계문화의 다양성을 증진하기 위한 마스터플랜을 마련하기로 합의하였다. 나아가 2005년 유네스코 33차 총회에서 '문화협약'을 발효시킬 것을 목표로 열띤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문화협약 구상이 구체화되자 가장 큰 위기 의식을 느낀 것은 미국 중심의 초국적 미디어기업들이었다. 영화, TV, 비디오 등의 산업 대표들은 지난 3월 워싱턴에서 '자유무역을 위한 문화산업연대'(EIC)라는 이익단체를 만들었다. 이들은 지난해 미국의 문화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5%에 해당하는 5,000억 달러(약 600조원)를 벌어들였고 이중 절반을 해외에서 벌어들였음을 강조하면서, 미국 정부를 향해 자유무역협정의 확대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외국정부와의 양자 협정을 통해 국제적 문화협약을 무력화시키는 전략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문화전쟁은 바로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3월 중순이후 미국은 여러 경로로 한미투자협정의 걸림돌인 스크린쿼터제의 축소 또는 폐지를 설득해왔다. 한국에서도 일부 경제관료와 정치인들이 스크린쿼터제의 축소 및 폐지를 주장하였고, 이어 여러 언론들이 가세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이것이 미국의 투자를 방해함으로써 한반도를 전쟁위기에 몰아넣는 반국가적인 제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미국과의 무역협정을 옹호하는 논리는 당사국에게 '최혜국 대우'와 '내국민 대우'를 보장함으로써 투자가 유치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근거는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다. 한미투자협정 체결이 한국사회에 미칠 엄청난 파괴력은 농산물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한-칠레 무역협정의 효과에 비할 바가 아니다.
미국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도 문화다양성을 증진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국과의 양자협상에서는 스크린쿼터 폐지를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런 이율배반의 논리를 알면서도 미국이 한국의 스크린쿼터제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은 영상·이미지 산업의 잠재적 가치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다.
오늘날 영화산업은 21세기의 전지구적인 '이미지 경제 전쟁'을 이끌어가는 전략 요충이다. 이는 비디오, 음반과 방송망을 통해 확장되는 복합영상산업의 핵심 고리이자 캐릭터 등 복합 이미지 산업의 중추이며, 관광산업의 전광판인 영상 콘텐츠를 포함한다. 미국은 이 전략요충을 장악함으로써 방송시장의 개방, 나아가 영상-이미지 산업에서의 완전한 지배력 확보를 겨냥하고 있다.
최근 논쟁에서 "스크린쿼터는 환란 시절에도 지켜졌던 국민적 합의사항이고, 미국의 이익을 위한 무역협정 체결을 위해 스크린쿼터를 건드리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 꿈과 미래, 관련산업을 포기하는 일"이라는 논리와 "규제완화와 자유화 조치가 한국영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왔고, 이제껏 남아있는 규제인 스크린쿼터제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서로 충돌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현행 의무상영일수 146일(40%)이 깨진다는 것은 1998년 스크린쿼터 투쟁이후 성장하고 있는 영상산업의 흐름을 되돌리는 것이며, 문화적 힘의 균형이 파괴됨을 의미한다.
영상문화산업은 미래의 산업이다. 최근 한국영화는 국가경제의 발전과 문화적 자존심의 형성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21세기 이미지 경제의 핵심산업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흐름을 뒤집어 놓고 과연 한국경제의 미래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
정 근 식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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