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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원 소설 "가을의 환"/중년여성통해 바라본 삶의 무정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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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원 소설 "가을의 환"/중년여성통해 바라본 삶의 무정형성

입력
2003.06.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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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幻): 변하다. 미혹하다. 홀리게 하다. 허깨비.'(국어사전)소설가 김채원(57)씨가 '幻(환)' 연작을 완성했다. 그는 1989년 '겨울의 환'을 발표했으며 90년에 '봄의 환'을, 91년에 '미친 사랑의 노래―여름의 환'을 잇따라 선보였다. 곧 끝날 것처럼 보였던 사계절의 '환'은 더딘 작업이 됐다. '가을의 환'을 쓰기로 하고 이것저것 메모해 놓고도 막상 첫 줄 '아직 너를 만나지 못했다'를 쓰기까지 오래 걸렸다. 연작을 시작한 지 14년만에야 완결편 '가을의 환'을 내놓았다. 네 편의 작품은 '가을의 환―환 연작소설집'(열림원 발행)으로 묶여 나왔다. "나와 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자각한다. 이 우스꽝스러움 속에서 맴돌다가 드디어 문을 닫고 들어앉아 버렸다. 그때 '가을의 환'이 씌어졌다."

느지막이 소설가로 등단한 화자는 패배감에 시달리는 중년의 여성이다. 어느날 스무 살쯤 어린 사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뭘 입고 있어?" "뭘 생각해?" '오늘은 어떻게 보냈어?" 같은 대화를 동이 트도록 계속하곤 했다. 젊은 남자는 여자와 섹스, 마리화나 같은 것들로 삶을 채웠다. 목소리만으로 열게 된 관계에서 여자는 이상한 쾌감을 얻었다. '무언가 내 영역 밖으로 나가보았다는 기쁨'이 생겼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만날 수 있지만 상대방과는 만나지 않기로 한' 약속이 10년이 됐다. "마지막 한 번, 가면을 쓰고 만나고 싶다"는 남자의 제안에 두 사람은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만나 사력을 다해 싸운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대를 의식하지 않은 나―나라고 규정짓던 것이 아닌 온전한 나―속에 잠겨 있을 수 있었다."

소설은 인간이 스스로의 얼굴에 씌운 가면 이야기다. 언제나 자신을 낯설게 생각해온 화자는 수화기 너머 사내가 들려주는 일탈적인 삶 얘기에서 축제의 환희를 느낀다.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아"라고 되풀이해 말하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기, 진실로 소통하지 않기, 가면을 쓰고 벌이는 게임의 규칙은 이런 것이다. 암묵적으로 지켜온 규칙을 깨고 수화기 밖에서 만나기로 한 순간에도 남녀는 가면을 쓴다. 두 사람이 모래사장에서 뒤엉켜 싸우는 마지막 장면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어선다. "네가 내게 황금 폭포수를 쏟아붓고 있을 때 올려다 본 너의 등 뒤에서 나비의 날개 같은 것이 돋아나고 있었다. 나는 눈이 부셔서 팔로 눈을 가렸었다. 네가 마약을 먹고 찬 시멘트바닥 벤치 위에 누워 있을 때 너는 애벌레였다. 그런데 나비의 그 날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가장 가볍고 가장 섬세하게 세상과의 경계를 그리며 거기에 돋아나 있었다."

'가을의 환'은 연작 중에서도 특히 몽환적이다. '환'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 가장 가깝다. 작가가 좇는 것은 삶의 무정형성이며, 그것은 일상에 젖은 중년 여성의 불안한 내면에서 짚어진다. 변하고, 미혹하고, 홀리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면, 작가는 '환' 작업을 통해 '삶의 구체성 없음'을 언어화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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