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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러시아의 중심 상트 페테르부르크]<2>창건 300주년의 역사적·정치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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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러시아의 중심 상트 페테르부르크]<2>창건 300주년의 역사적·정치적 의미

입력
2003.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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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3년 표트르 대제가 핀란드 만 부근에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함으로써 러시아 역사의 방향은 크게 바뀌었다.러시아는 10세기 말 현재의 우크라이나 키예프 지역에서 출발하여 몽골 침략으로 세력 중심을 북쪽으로 이동한 후 16세기 중반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하게 된다. 이후 러시아는 서쪽의 유럽과 단절을 겪으며 라틴어 문화권으로부터 격리됐을 뿐 아니라 유럽을 휩쓸었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인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 채 17세기 말까지 낙후된 나라로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등장은 러시아의 역사에서 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개혁 군주 표트르 대제의 목표는 서구를 모델로 러시아를 개혁하여 단 기간에 유럽 선진 국가 반열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의 표면적 이유는 스웨덴으로부터 점령한 영토 방어를 위한 요새 구축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보수적인 세습귀족들이 군주의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스크바를 벗어나 새로운 도시를 중심으로 강력하고 풍요로우며 계몽된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1712년 제국의 수도가 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이에 따라 모든 면에서 반 모스크바를 표명했다. 황제는 교회를 자신의 관할 아래 두고 세습귀족 대신 계서적(階序的) 관료제를 도입하는 등 혁명적 조치를 단행했다. 아울러 서구 선진 기술을 도입해 조선, 기계제작, 광학 분야 등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교육 및 예술 분야의 국제 교류도 적극 추진했다. 이렇게 해서 네바 강변의 새 수도는 당시 유럽 최고의 문화를 러시아로 수입하는 중요한 채널, 이른바 '유럽을 향한 창'으로 떠올랐다.

한편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탄생은 러시아의 국가 정체성에 대한 열띤 논쟁의 단초를 제공했다. 러시아가 '아시아에 속하는 유럽'인 동시에 '유럽에 속하는 아시아'이기도 한 특이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러시아의 발전 방향을 놓고 서로 견해를 달리하던 인텔리겐챠는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로 양분되어 기나긴 논쟁을 시작했다. 서구적 기준으로 볼 때 낙후된 러시아는 슬라브주의자들에게는 오히려 유럽이 결여하고 있는 정신적 자산을 보유한 소중한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표트르 대제의 위로부터의 혁명은 모스크바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목표로 삼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러시아 역사의 근본적인 환경을 극복하지는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표트르 대제 이후 지속된 러시아의 서구화 과정도 로마로부터 이어온 서구의 법치주의 및 합리주의 정신과는 거리가 먼 러시아적 전통을 상당 부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를 유럽의 일부라고 여기는 러시아인들이 유럽에 대해 묘한 콤플렉스와 자부심을 함께 느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1917년 공산 혁명은, 200년 이상 서구로 향해 있던 러시아의 시선을 반대쪽으로 되돌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모스크바가 다시 수도가 된 것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 창건 못지 않은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표트르 대제에게 모스크바가 극복 대상이었듯이 볼셰비키들에게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철저히 부정해야 할 과거의 유산이었다. 모스크바로 다시 수도를 옮긴 것은 유럽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소비에트의 독자적 발전 모델을 추구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모스크바를 수도로 하는 소비에트 러시아(소련)는 그 후 혁명의 화석화 과정을 겪으면서 20세기 말에 '다시 한번' 유럽으로부터 낙오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소련 붕괴 이후 10여 년 동안 혼란을 경험하던 신생 러시아 연방의 지도자로 블라디미르 푸틴이 부상했다. 이 젊은 대통령이 물려받은 역사적 정치적 상황은 300여 년 전 표트르 대제 시대의 그것과 흡사하다. 낙후된 러시아를 발전시키려면 외국, 특히 서구와의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즉 그 동안 모스크바에 지나치게 집중되었던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 에너지의 일부를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기려는 푸틴 정권의 일련의 행보는 즉흥적이라기보다는 러시아 국가의 장기 발전 전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번 한국일보와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지원사업)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재조명 기획은, 훗날 러시아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가 다시 한번 방향을 틀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록될 그런 순간을 가까이서 지켜보고자 하는 것이다.

김 현 택 한국외대 노어과 교수

■"문화의 수도" 자부심 불구 주거환경 개선등 숙제로

나이로 친다면 300살이 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에서는 젊은 도시에 속한다. 1997년에 850주년 행사를 치렀던 모스크바가 보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이 갖는 자부심은 나이를 뛰어넘는다.

블라디미르 야코블레프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장은 지난달 27일 열렸던 창건 30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러시아의 진정한 수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라고 거침 없이 말했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시민들도 의례적인 공치사로 여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비록 역사는 짧지만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수도로 있던 제정 러시아 200년 동안 러시아는 유럽의 문물들을 받아들이며 화려한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철도가 놓였던 산업의 중심지, 최초의 음악·발레학교가 문을 연 문화·예술의 도시, 2차 대전 중 60만명이 숨지는 와중에서도 900일 간의 독일군 포위공격을 버텨냈던 영웅적인 도시가 상트 페테르부르크이다. 역사적 변곡점마다 혁명의 도시로 앞장서며 세상을 바꾼 것도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이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그래서 수도 모스크바 사람들을 '촌놈'이라고 부르며 한 수 아래로 여긴다. 모스크바 팀과의 축구 경기가 열리면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은 '지역감정' 비슷한 것까지 드러내며 열을 올린다.

이런 자부심이 이번 300주년 기념행사 준비에 녹아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직접 준비위원장을 맡아 4년 동안 15억 달러를 투입해 시 전체를 새로 단장하다시피 하며 행사를 준비했다. 한 도시의 축제가 아닌 유럽인, 세계인의 축제로 만들기 위해 50개국 정상들이 초청됐다.

그러나 화려하고 완벽한 행사를 위해 시민들이 지나친 통제와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는 점에서 불만도 터져 나왔다. '문화의 수도'라는 자부심 만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목소리도 들렸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지역구인 유리 리바코프 의원은 "과도한 행사 준비에 열을 올리기보다는 그 돈을 시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데 쓰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도시 인구 470만명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30만 가구가 낡고 허름한 '공동주택'에 살고 있는 것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방 하나에 한 가구씩, 여러 가구가 함께 살며 부엌 등은 함께 쓰는 집이 상당수이다.

창건 300주년을 맞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세계에 알리며 시민들의 자존심을 세워준 푸틴 대통령의 다음 과제는 이들의 생활을 보살피는 일일 것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진성훈 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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