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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지식]<16>卽心卽佛의 개안종사 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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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지식]<16>卽心卽佛의 개안종사 전강

입력
2003.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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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림 없는 행각, 곧 무애(無碍)의 공간을 넓혀가던 전강이 범어사에 잠시 머물 때 였다. 고승 기유담(奇乳潭)은 전강에게 가끔 곡차(술)를 권했다. 수행자에게 술과 파계는 동의어다. 하지만 전강은 이를 물리치지 않았다. 전강이 어느 날 기유담의 권유로 술잔을 들고 있었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유명한 강사 경명이 들어왔다. 경명은 화엄경에 통달한 학승이었다. 술 냄새에 경명의 얼굴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고함이 터져나왔다."여기가 어딘데 감히 술을 마시고 있는가!" 분노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전강이 말을 받았다.

"그래, 내가 술 마시는 것이 그렇게 못 마땅하다면 상본화엄(上本華嚴)이 일시천하 미진수품(微塵數品)인데 이 술잔은 몇째 품에 속하는가?" 술 마시는 일이 화엄경의 몇 째 품에 드느냐고 역습을 한 것이다. 경명은 말문이 막혔다. 술잔을 다시 든 전강은 한 마디를 내던졌다.

"해저이우(海底泥牛)는 성룡거(成龍去)인데 파별(跛鼈)은 의전입망라(依前入網羅)라." 바다 밑 진흙 소는 용이 되어 가는데 절름발이 자라는 눈 앞의 그물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진흙 소는 전강 자신, 자라는 경명에 비유한 말이리라. 전강의 말이 자기합리화는 아닐 것이다.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된다는 원효의 말을 빌려 전강의 행위를 유추해볼 수 있다. 결코 견강부회는 아닐 것이다. 곡차를 마실지라도 전강은 진여(眞如·진리)의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자성을 본 개안종사(開眼宗師)로서 늘 자비심이 충만했다.

유년시절 전강은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과 맞닥뜨리면서 깊은 상처를 받는다. 계모 마저 이복동생을 내팽개치고 집을 떠나자 작은 가슴은 절망으로 가득찬다. 방황은 이렇게 시작됐다. 유기공방 풀무간에서 마음을 달래던 전강은 유기장사를 하면서 절집과 인연이 닿았다. 15세에 머리를 깎을 때까지 전강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다양한 밑바닥 삶을 겪었다. 훗날 전강의 걸사행각은 어린 시절과 무관하지 않으며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에 대한 애정의 발로였다.

어제 밤 달빛은 누각에 가득하더니(昨夜月滿樓·작야월만루)

창 밖의 갈대꽃은 가을이로네(窓外蘆花秋·창외노화추)

부처와 조사도 목숨을 잃었는데(佛祖喪身命·불조상신명)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네(流水過橋來·유수과교래)

견성(見性)의 문을 열어 젖힌 전강영신(田岡永信·1898∼1975)의 오도송이다. 격외선(格外禪)의 미학이 은근한 서정에 절묘하게 스며 있다. 격외는 상식을 넘어선 파격이다. 3, 4번째 연에선 살불살조(殺佛殺祖)의 부정의 논리가 번뜩인다. 그러나 그 부정의 논리는 새로운 세계의 창조,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낳는 긍정의 미학으로 치환된다. 제자들이 엮은 '전강법어집'은 이러한 전강의 독창적인 오도의 세계를 잘 드러내 보인다.

만공의 인가를 받은 며칠 뒤 스승과 제자는 절 마당을 거닐었다. 달과 별이 유난히 밝은 만추의 밤이었다. 만공이 물었다. "부처님은 새벽 별을 보고 오도하셨는데 저렇듯 많은 별 중에 전강 자네의 별은 어느 것인가?" 전강은 아무 말 없이 땅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허우적거리며 별을 찾는 시늉을 해보였다.

만공의 물음은 수 많은 별 가운데 반야의 빛을 전해주는 별이 어느 것이냐는 의미였다. 전강의 몸짓은 그야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에 다름 아니다. 부처의 가르침이나 마음은 문자나 언어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참선이란 조사관(祖師關)을 뚫는 일이요, 묘오(妙悟)는 중생의 마음 길을 아주 끊는 것이다. 조사관은 뚫는 것이지 도저히 지혜로는 해석되지 않는다." 조사관은 깨달음의 바다로 들어가는데 통과해야 할 관문이다. 전강은 언하대오(言下大悟) 라는 말을 즐겨 썼다. 살아 있는 단 한 마디의 말로 무명의 덫에서 벗어나라는 할(喝)이다. 전강은 그래서 제자들에게 판치생모(板齒生毛)의 화두를 권했다. 판치생모는 조주(趙州)가 창안했다. 조주는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가"라는 제자의 물음에 "판치생모" 라고 대답했다. 판치는 앞니, 생모는 곰팡이가 생긴 것을 이른다. 앞니에 곰팡이가 피다니, 이 무슨 해괴한 답변인가. 조주의 답변은 논리를 박탈하고 있다. 온갖 의혹과 분별을 차단하고 언하대오 만이 일대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임을 깨우쳐준 것이다.

" '깨닫는다' 는 것과 '안다'는 것은 전혀 다른 길이다. 안다는 것은 화(禍)의 문이요, 생사의 문이다. 아는 것이 아무리 많고 높고, 그리고 깊어도 생사해탈이나 견성성불과는 관계없는 다른 길이다." 깨달음은 찾음과 구함의 대상이 아니다. 부처의 가르침도 반야의 대지로 인도하는 방편에 불과하다. 부처가 될 씨앗을 저마다 갖고 있는데 세상 천지 어느 곳에서 깨달음을 찾고 구하겠는가.

"절만 맡고 사무만 보려 하고, 정치 방면으로 놀아나면서 돈만 모으고 명예만 취하려고 하는데 중에게 명예가 무엇이냐. 부처님 앞에 올려놓은 돈을 마음대로 내려서 도도 닦지 않고 먹는 것은 큰 사기요, 큰 죄업이요, 큰 도둑놈이다. 세상에 나가서 자기 손으로 벌어먹어야 죄나 짓지 않지 몹쓸 인연을 그대로 둔다면 부처님의 정법이 크게 상한다." 전강은 명리나 종단권력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수행은 게을리 하면서 닭벼슬보다 못하다는 중벼슬을 탐하는 무리를 안타깝게 여겼다.

즉심즉불(卽心卽佛·마음이 곧 부처)의 법음으로 중생의 무명의 거울을 닦아주던 전강의 육신에도 낙조가 깃들었다. 1975년 1월13일 전강은 육신의 누더기를 벗고 영생의 법신(法身)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용성·만공·혜월·혜봉·보월… 당대의 종사들 "岸樹井藤" 설화놓고 반야의 검 일합

선불장(選佛場)이라는 깨달음의 노래가 있다. 선불장은 말 그대로 부처를 뽑는 곳이다. 과거장을 수행도량에 비유한 것이다. 전강의 오도의 열매가 익어가던 1920년대 말 내로라 하는 종사들이 반야의 검으로 일합을 겨뤘다. 이른바 선불장이 펼쳐진 것이다.

망월사의 조실 용성(龍城)은 안수정등(岸樹井藤)의 설화를 예로 들며 "등나무넝쿨에 매달려 꿀방울을 먹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면 살아나겠느냐"고 제방의 선지식에 질문을 돌렸다. 법거량에 응한 선객은 만공(滿空) 혜월(慧月) 혜봉(慧峰) 보월(寶月) 고봉(古峰)이었다. 본분종사의 위상을 확립한 선의 준걸들이었다. 여기에 전강도 말석으로 참여했다. 불교의 비교문학인 안수정등의 이야기는 이렇다.

'한 사람이 망망한 광야를 가는데 무서운 코끼리가 쫓아왔다. 그는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언덕 밑의 우물을 발견했다. 우물 속으로는 등나무 넝쿨이 늘어져 있었다. 넝쿨을 타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밑바닥에는 독룡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우물중턱의 사방을 둘러보니 네 마리의 뱀이 혀를 날름거렸다. 할 수 없이 넝쿨을 생명줄로 삼아 우물 중간에 매달려 있다 보니 팔은 아파서 빠질 것 같은데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넝쿨을 쏠기 시작했다. 쥐가 쏠아서 넝쿨이 끊어지거나 팔의 힘이 빠져 떨어질 때는 독룡에게 잡혀먹히는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위를 쳐다보니 등나무에 매달린 벌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한 방울씩 떨어져 입 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위태로운 상황도 잊고 꿀맛에 취했다."

여기서 한 사람은 생사고해에서 헤매는 중생을 가리킨다. 망망한 광야는 육도윤회, 코끼리는 무상살귀(無常殺鬼)를 이르며 우물은 사바세계, 독룡은 지옥을 뜻한다. 네 마리의 뱀은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4대(四大), 등나무는 무명수(無明樹), 넝쿨은 사람의 생명줄이다.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이고 꿀은 재물, 색, 음식, 수면, 명예욕을 상징한다. 다음은 참가자의 답이다.

용성=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와 삼밭에 누었노라(瓢花穿籬出 臥在麻田上·표화천이출 와재마전상)

만공=어제 밤 꿈속의 일이니라(昨夜夢中事·작야몽중사).

혜월=알래야 알 수 없고 모를래야 모를 수 없고 잡아 얻음이 분명하도다(拈得分明·염득분명).

혜봉=부처가 다시 부처는 되지 못하리라(佛不能更作佛·불불능경작불).

보월=어느 때 우물에 들었던가(何時入井·하시입정).

고봉=아야, 아야.

전강=달다!

선가에 회자(膾炙)되는 일전이었다. 사족을 달자면 지혜의 칼날 위에서 겨루는 법거량에는 정답이 없다. 아니 누구나 정답을 낼 수 있다. 깨달음을 증득한 선의 달인들의 문답에는 분별의 티가 묻지 않은 절대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고수만이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 연보

1898.11.16. 전남 곡성 출생. 속성은 동래 정(鄭)씨

1913. 해인사에서 출가, 법호 전강, 법명 영신

1921. 태안사에서 대오(大 悟)

1932. 범어사 조실

1962. 인천 주안 용화사에 법보(현 용화)선원 개설

1975.1.13. 세수 77, 법랍 62세로 용화사에서 적멸(寂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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