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세월이 지났어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장의 삽화가 있다. 멀리 중앙 아시아에서의 일이었다. 카자흐스탄 잠불에서 저녁 공연을 앞두고 단원들과 잠시 숙소에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저만큼 사립문 안으로 카레이스키(고려인)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섰다. 반백의 초로였으며 차림새는 가난이 송송 배여 남루했다. 거동마저 불편한 듯 걸음새마저 우둔하기 짝이 없었다.그 아주머니가 힘에 부치게 겨드랑이에 끼고 온 물건은 다름 아닌 살아 푸덕대는 암탉이었다. 눈치로 알아차려야 할 만큼 빈약한 모국어로 전하는 말은 이랬다. 하바로프스크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님으로부터 조국 이야기를 자장가처럼 듣고 자랐다.
그러나 꿈속의 고향을 가보기는커녕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1937년에 이역만리 중앙아시아로 쫓겨와야 했다. 고단한 삶의 여로 속에서 뜻밖에 조국에서 온 피붙이들을 만나게 된 것이 너무 기뻐 키우던 닭이나마 가져왔으니 단원들끼리 삶아 먹으라는 것이었다.
돈으로만 따진다면 그저 몇 천 원 짜리 닭 한 마리의 얘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이 한 장의 정겨운 스냅은 한 폭의 명화처럼 자리하고 있다. 이 얼마나 따뜻한 인정의 표출이며 얼마나 순수하고 극진한 사람대접인가. 탈진한 사막의 캐러번들이 만나는 오아시스의 샘물 같은 감동이 아닐 수 없으며, 물질문명의 신기루만 좇다 만신창이가 된 우리 모두가 갈구하는 영혼의 궁극적 기착지였다. 정말 까맣게 잊었다가 시간의 퇴적층에서 찾아낸 선조들의 진귀한 보물임이 분명했다.
그동안 우리 삶은 국가총생산(GNP)만 우상처럼 떠받치는 바보들의 행진이었다. 머리의 똑똑함만 횡행하고 가슴의 따뜻함은 치기로 여겨진다. 그래서 경제발전과 인간미는 반비례하는 세태가 되었다. 가슴의 동공이 점점 커져 가니 허전하고 고적할 수밖에 없다. 따뜻한 정(情)이 없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정이 많은 민족이었다. 두렛일, 마당놀이를 하며 정을 삶의 동인으로 삼았던 우리다.
이같은 정겨운 풍토가 20세기 들면서 척박해지기 시작했다. 역사의 진운은 새로운 문명의 바람을 일으켰고, 물질을 앞세운 문명의 조류는 강토의 구석구석에서 정의 문화를 쓸어냈다.
살 맛의 효소였으며 살 맛의 원천이던 정의 문화는 알맞은 풍토를 찾아서, 아니 정의 문화를 구박하는 괴물에 밀려서 하나 둘 고향을 떠났다. 간도로, 원동으로 떠났다. 다시 흘러 흘러 중앙아시아의 황야로 떠났다.
긴 역사의 여정을 떠돌다 보니 남은 것은 손때 묻은 누더기 봇짐 하나뿐이었다. 애지중지 쌈짓돈을 챙겨 넣듯 닭 한 마리의 정을 싼, 품은 작지만 소중한 타임캡슐 속의 괴나리 봇짐 하나였다. 하지만 바로 그 괴나리 봇짐 속의 이끼 낀 메시지를 해독하고 공감하는 날 우리의 진정한 행복도 비로소 내밀한 속내를 드러낼 것이다.
한 명 희 이미시 문화서원 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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