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타계한 미국배우 그레고리 펙의 오스카 남우주연상 수상작은 '앵무새 죽이기'였다. 국내에는 '앨라배마에서 생긴 일'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됐었다. 그가 맡은 배역은 백인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흑인을 돕는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다. 핀치는 최근 미 영화연구소에 의해 '100년 영화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선정됐을 만큼 의미있는 캐릭터다. 그러나 전원 백인인 배심원들은 끝내 유죄평결을 내렸고, 흑인은 이송 도중 도주하다가 사살된다. 이 영화에서 아이들이 장난삼아 사냥을 하는 앵무새는 힘없는 유색인종이나 죄없는 타자(他者)의 상징이다.■ 흑백 인종문제가 아니더라도 성폭력의 무죄 입증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피해를 입증하는 일이 더 어려워 보인다. 특히 사회적 약자나 미성년자인 경우 앵무새를 잡거나 무심하게 개구리에게 돌 던지듯 일을 저지른 성폭행범에 제대로 대처하기란 정말 어렵다. 딸이 유치원장에게 일을 당해 5년 넘게 법정공방을 벌였던 성폭력 피해자가족모임의 대표는 딸과 함께 8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성폭력 피해아동의 진술을 녹화한 경찰의 증거자료가 최근 법원에 의해 처음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 또 어제부터는 13세 미만 아동의 성폭력피해사건에 대한 전담검사제가 운영되고 있다. 전담검사가 경찰 조사과정부터 참여함으로써 중복 수사로 인한 고통을 덜어주자는 취지다. 그러나 피의자와의 대질 없이 1회 진술만으로 끝내면 수사가 부실해져 엉뚱한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는 논란은 여전하다. 서울지검 관내에서만 연간 150여 건의 13세 미만 성폭행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전담검사 혼자서 충분히 수사를 할 수 있는지도 사실 의문이다. 그래서 검·경 및 아동심리 전문가로 구성된 조사팀을 제 3기관 소속으로 운영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 그러려면 전문조사팀의 수사결과가 증거능력을 인정받도록 형사소송법을 고쳐야 하는데, 법 개정도 중요하지만 있는 법부터 적극적으로 해석했으면 좋겠다. 성폭력범 얼굴 공개의 경우 이중처벌이라는 이유로 지난해 7월 위헌심판이 제청된 상태이지만,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지금까지도 감감 무소식이다. '앵무새'는 자꾸 죽어가고 헌재의 적극적인 판단을 기다리는 사람은 많은데 너무 무심하지 않은가 싶다. 어제도 기독교여성상담소는 교회 내의 성폭력이 매우 심각하며 거꾸로 피해자들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사례도 있다는 놀라운 자료를 발표했다.
/임철순 논설위원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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