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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호국영령 지킴이 이치율씨 국립현충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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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호국영령 지킴이 이치율씨 국립현충원 이야기

입력
2003.06.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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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초등학교 때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1996년에 국립현충원으로 바뀌었다)에 소풍을 가서 곰곰이 이 글을 읽으면 왠지 가슴이 뭉클했다. 묘지 정면의 현충탑 제단 오석에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의 글씨로 새겨진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의 헌시다. 그때야 물론 이 두 사람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인식할 나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지난 주 현충원을 찾았을 때 다시 그 글귀를 보았다. 문득 그때와 같은 느낌이 밀려들면서 콧날까지 시큰해졌다. 뜻밖이었다. '조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낱말들, 심지어 국기에 대한 경배조차 낡은 이념의 잔재처럼 냉소받는 시대인데….

그래, 누가 글을 짓고 또 누가 썼건 그게 무슨 대수이랴. 이제 와 이런저런 해석이 덧씌워져 이 곳에 묻힌 이들의 죽음이 경시되고 폄하된들 그들로 하여 지금 우리가 여기까지 와 있음은 엄연한 사실일지니. 이치율(李治律·57)씨는 그 무상한 세월을 묵묵히 지켜 온 국립묘지의 산 증인이다.

이씨는 올해 말로 정년을 맞는다. 30대 중반이던 1982년 동작동 국립묘지에 몸 담아 20여년을 '호국영령', 아니 정확히는 그들의 유가족과 함께 해왔다. 사진작가로 활동하다 홍보업무를 위해 특채된 뒤 민원, 교육, 전례(典禮), 영현(英顯) 등 국립현충원의 모든 업무를 두루 맡았다. 거처도 현충원 경내의 관사인데다, 다른 이들처럼 국방부 등지로 순환근무도 하지 않았으니 온전히 이 안에서만 반생을 보낸 셈이다. 그러니 5만4,000여 기 묘는 물론, 10만4,000여 위패와 무명용사의 6,000여 유골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군데 그의 손길이나 눈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현충원에서 그토록 오래 근무한 그에게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게 뭘까. 답은 재미있게도 '귀신'이다. 하긴 수많은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니까. 처음 일반묘역 안내업무를 맡았을 때부터 그랬다. "귀신이 있다고 믿습니까?" "귀신을 봤다든지, 아무튼 귀신 관련한 재미있는 얘기 좀 해주세요." 그 때는 난감해서 "여기엔 일반 귀신이 아니라 민족을 지키는 수호신이 계신다"고 어정쩡하게 대답하고는 자리를 피했다.

지금은 바뀌었다. "귀신은 없다"다. "요즘도 잠이 안 오면 깊은 밤 관사를 나와 경내를 산책합니다. 맑은 공기와 고요한 분위기가 좋아서지요. 유해 숫자로야 어느 공동묘지가 이만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지금껏 한번도 귀신을 본 적이 없어요. 저 말고도 여기 근무한 사람 중 아무도 보았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얘기야 재미 삼아 할 수도 있지만 정작 그를 씁쓸하게 하는 건 많은 이들이 현충원을 그냥 '묘지'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딸을 출가시킨 친구가 내게는 알리지도 않았더라구요. 경사(慶事)에 오는 게 껄끄러웠던 모양입디다." 또 한번은 급한 일이 생긴 상사 대신 축하를 전달하러 간 적이 있었다. "국립묘지의 ○○○과장께서 인사를…"하는데 혼주가 외면하며 자꾸 자리를 피했다. 뒤늦게 이유를 깨닫고는 "국방부(현충원은 국방부 산하다)의 ○○○과장께서…"로 고쳐 말하니 그제야 "아, 예"하며 인사를 받더란다. 야간 당직근무 중 잘못 걸려온 전화에 "국립묘지입니다" 하면 "뭐요? 재수없어"하고 끊어버리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나 현충원은 결코 희생자 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현충원도, 현충일도, 6월 '호국보훈의 달'이란 것도 사실은 살아있는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순국선열이나 전몰자들을 한번쯤 생각해 봄으로써 살아있는 우리 모두가 하나임을 확인하자는 뜻이지요."

이씨는 이런 취지로 현충원을 교육의 장(場)으로 만들 것을 역설, 현재 연간 10만여명의 요청을 받아 이뤄지는 이 곳 '현충선양관' 교육의 틀을 세웠다. 특히 방문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95년 그가 제작 지휘한 영화 '학도의용군'은 대한민국영상음반 대상을 받았다. 한국전 당시 학도병들의 얘기를 담은 30분짜리 영화다. 재일동포학생 참전과 관련, 협조한 일본 자위대로부터 "어린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목숨을 던진 사실 자체도 놀랍지만 이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노력도 대단히 감동적"이라는 찬사도 들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씨가 생각하는 현충원의 가장 큰 역할은 유족의 한(恨)을 풀어주는 일이다. "어떻게 풀어주냐고요? 최대한의 예우와 격식을 갖춰 의식(儀式)을 진행하는 겁니다. 유족에게 '아, 국가가 우리를 위로하려 이렇게 애쓰는구나'하는 느낌이 들도록 말이지요." 그는 그렇게 매년 70여회에 달하는 합장(合葬·작고한 미망인을 남편 묘에 함께 묻는 것)과 50여차례 추도식을 주관해 왔다. 85년 동작동 묘지가 만장(滿葬)되기 전까지는 안장식도 그의 소관이었다.

"…나라를 구하고 산화하신 고(故) ○○○님, 평생을 외롭게 살며 후손을 훌륭히 키우신 고 ○○○여사님, … 이제 두 분의 묘소는 국가에서 관리합니다. …" 유족의 표정에 자부심이 어릴 때의 보람은 크다. 그러나 가족도 변변히 없는 외로운 합장식에서는 어쩔 수없이 그의 마이크 목소리에도 울음이 섞인다.

"유족들은 온통 억울하고 서러운 일 뿐이지요. 누구라도 금쪽 같은 가족을 잃었다면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그래서 평소 그들을 위로하고 민원을 받아주는 것도 그의 일이다. 그럴 때면 그저 조용히 얘기를 듣는다. 혼자된 뒤의 고달픈 인생살이까지 몇 시간이고 사연이 이어지기 십상이다. 민원에 걸어 서러운 심정을 나라(그들에게 이씨는 국가의 대리인이다)에다 털어놓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감정이 누그러지면 대부분은 "묘소를 잘 관리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후련해진 표정으로 일어선다.

작은 일에도 서운해 하는 것은 일반묘역의 유가족 만이 아니다. 유명인사의 유족이나 관련단체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비석에 약간 긁힌 자국만 있어도 난리가 나기 일쑤다. "일제 때 그 모진 핍박을 받은 우리 아버님 묘소가 어떻게 대통령보다 작을 수 있느냐. 그들은 다 호의호식한 사람들 아니냐. 차라리 훈장을 반납하고 일본에 귀화하겠다"고 격렬하게 항의하던 애국지사의 후손도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는 박정희 전대통령 유족이 비교적 '관대'한 편이라고 했다. 지난달 정신이상자가 묘소 잔디를 태운 며칠 뒤 참배 온 박근혜(朴槿惠) 의원은 "큰 표는 안 나네요"라며 도리어 이씨를 격려했다.

자칫 관리에 형평을 잃을까 봐 가급적 특정 유족들과의 깊숙한 유대를 피하는 이씨가 그래도 안타깝게 기억하는 이가 있다. 청주의 김언년 할머니다. 김 할머니는 한국전에서 군·경 남편과 네 아들, 사위까지 무려 여섯 가족을 잃었다. 하지만 전사 기록 뿐 유골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아 묘소를 세울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여섯이나 나라에 목숨을 바쳤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 나라도 여기에 묻히게 해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위패로 봉안하는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런 이들을 위해 현충탑 바로 뒤편에 위패실을 마련, 각종 현충행사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도록 상징적 배려를 했다. "그래도 이맘 때마다 유족 수백명이 좁은 장소에 모여 제사 차례를 기다리는 걸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이씨가 해온 일은 이 뿐이 아니다. 적은 봉급을 털어 국방부와 군·경, 신문사 등을 뛰어다니며 자료를 수집, 묘지誌 '민족의 얼'도 만들었다. 현충원 안에 납골당을 만들도록 한 것도 그다. "98만평에 달하는 대전 현충원도 2010년을 넘어서면 곧 만장이 됩니다. 그만한 묘지를 또 만들 수는 없지요." 끈질긴 제안은 98년 조성태(趙成台) 국방부장관 때 결실을 맺었다. 2006년이면 3만2,000기 규모의 납골당이 완공된다.

이씨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것도 가장 보수전통교단인 예수교장로회 소속이다. 94년에는 총신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유족의 종교의식에 편견을 드러내지 않는다. "저는 기독교인이지만 여러분의 식대로 하십시오" 한마디할 뿐이다. 종교를 떠나 유족들은 그의 도움과 보호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내년부터는 성직자의 길을 걸으며 지금껏 여기서 그래왔듯 사회에서도 한 많고 소외 받는 이들을 도우며 살 계획이다.

"일반 참배객이 자꾸 줄어드는 게 제일 섭섭하지요. 처음 왔을 때는 일년에 300만명 쯤 찾았는데 글쎄, 요즘은 한 100만이나 될까요? 가끔 학생들을 데리고 오는 교사들의 태도도 전처럼 진지하지 않고…. 아마 최근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도 무관치 않을 겁니다."

하루종일 현충원은 적막했다. 병아리 같은 유치원 원아들과 일단의 장병들만 드문드문 찾아와 참배했다. 그럴 때면 3군 의장병이 도열하고 진혼곡(鎭魂曲)이 연주됐다. 낙조에 물들어 가는 한강 너머로 퍼지는 그 장중하고도 구슬픈 나팔소리란….

"참배가 아니더라도 휴식공간 삼아 누구나 자주 찾아오면 좋겠어요. 도심에 이만큼 잘 가꿔진 43만평 녹지가 어디 있습니까. 그냥 조용히 산책하며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현재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케 되지요."

이씨의 배웅을 받으며 현충원 정문을 나서자마자 돌연 거대한 퇴근길의 차량소음이 덮쳐 들었다. 전쟁터 같은 동작동 길을 다들 앞만 노려본 채 허겁지겁 지나갔다.

이준희/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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